프랑크푸르트 Städel Museum의 Käthe Kollwitz 전시회
교포신문에서는 “아달의 전시와 공연”이라는 제목으로, 독일 주요도시에서 펼쳐지는 전시와 공연을 소개합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프랑크푸르트 박물관 거리에 위치한 Städel Museum에서는 3월 20일부터 8월 9일까지 Käthe Kollwitz 작품 전시회를 갖는다.
이번 전시회에는 그녕의 초기 작품 110여 점이 소개되는데, 베를린 Kupferstichkabinett, Käthe Kollwitz Museum Cologne, 시카고 미술관, Sprengel Museum Hanover 및 Staatsgalerie Stuttgart 등지의 소장품을 한 데 모아 보여주고 있다.
케테 콜비츠, 모성애 넘어 인류의 고통과 아픔을 끌어안다
‘케테 콜비츠’는 작품을 통해 끈질기게 당대의 굶주림, 가난, 탄압, 인권유린, 전쟁을 고발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작품들에는 웃음이 없고 무거운 기류가 잔뜩 흐른다. 그녀는 다양한 색채를 거부하고 오직 검은색만 고집했는데 이를 통해 작품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콜비츠는 어느 작가보다도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거의 완벽하게 보는 이에게 전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작품이 자기가 살았던 한 시대를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이 그 시대를 넘어 지금에까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작가가 특수한 현실 내지 대상을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세계를 또 하나 지배했던 것은 ‘죽음’이었다. 그녀의 일상조차 죽음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의 삶에는 항상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녀는 아들 페터를 잃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큰손자 페터마저 죽음의 늪에 내려놓아야 했다. 모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전쟁과 죽음, 그녀에게는 풀기 어려운 영원한 숙제였다. 그녀의 개인 불행이 아니라 동시대 어머니들이 겪었던 비극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 지배자들의 제국주의 야욕에 제물로 끌려가 희생됐다. 전쟁은 전 유럽의 젊은이들의 꽃다운 목숨을 의미도 없이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 침잠하던 케테 콜비츠는 마침내 자신의 불행을 시민의 고통으로 승화시켰다. 유럽사회의 한 세대가 전멸하는 죽음의 역사가 거침없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반전을 주제로 전쟁에 관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실패한 아틀리에 미술’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대의 한복판으로 이끌어 냈다.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여인, 케테 콜비츠
콜비츠는 1867년 쾨니히스베르크(현 칼리닌그라드. 러시아 영토)에서 태어났다. 콜비츠는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변호사였던 그녀의 아버지(Schmidt)는 당시 보수파였던 비스마르크 정권의 월급을 받아 가정을 유지하기 싫다며 공무원 되기를 거부할 만큼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존재로만 받아들여졌다. 유럽에서도 후진이었고 비민주적이었던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은 3K, 즉 교회(Kirche), 요리(Küche), 아이(Kind)를 담당하는 인간으로 취급되었다. 콜비츠가 태어난 19세기 후반 가정에서 여성의 지위는 더욱 낮아서 남편에게 철저히 종속되었다.
콜비츠는 당시 우수성을 인정받은 관립 미술학교에는 입학할 수 없어서 여자미술학교에 다녀야 했다. 다행히도 훌륭한 스승을 만나 사회의식에 눈떠 판화를 배웠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과 더불어 노벨문학상을 수상(1912)한 당대의 지성인 게르하르트 하웁트만(Gerhart Hauptmann, 1862~1946)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사회 비판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그녀는 특히 하웁트만이 선보인 무대 작품 <방직공의 봉기(Weberaufstand)>에서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둘째 아들 페터가 자원해 나간 전쟁터에서 전사한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1924년에 그린 <전쟁은 이제 그만(Nie Wieder Krieg)>이란 작품은 작가의 반전주의 사상을 대변한다. 콜비츠는 평화주의자의 기수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사회 빈곤 문제도 작품에 반영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나치가 정권을 잡자, 다시 수모와 시련을 겪는다. 나치는 그녀의 작품을 ‘타락한 예술’로 분류하고, 게슈타포는 콜비츠를 체포하려고 조사 협박한다. 콜비츠는 자신을 체포하면 국제적으로 억압 사실을 알리겠다고 저항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한다. 해외 구명운동도 도움이 됐다. 1941년에는 손자마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그 무렵 반전 작가로서의 메시지는 더욱 뚜렷해진다.
콜비츠는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전쟁은 이제 그만>을 비롯해 <배고픔>, <전쟁과 살육>, <아일랜드의 빈곤>, <빈곤>, <독일 아이들이 굶고 있다>, <실직>, <빵>, <전쟁터> 등의 작품을 남겼다.
나치 파시즘 정권이 지배하면서 케테 콜비츠는 온갖 압박을 받고 작품을 발표할 기회마저 빼앗겼다. 중국의 노신은 “이 위대한 여류예술가는 오늘날 침묵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작품은 점점 극동으로까지 퍼지고 있다. 예술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말년에 케테 콜비츠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나치 치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악몽이었다. 아무런 이유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 저항과 절망, 그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 영혼을 내맡겼던 그녀, 케테 콜비츠는 1945년 4월 22일 7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8일 뒤 히틀러도 죽었다. 다시 일주일 뒤 나치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Städel Museum
Schaumainkai 63,
60596 Frankfurt am Main
1354호 28면, 2024년 3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