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59)

바이마르를 걷는 일은 그 자체가 영광스럽다. 거리 어디에도 허투루 지어진 건축물이 없고, 이야기가 깃들여져 있지 않은 장소가 없다. 골목마다 바이마르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상이 세워져 있고, 그들이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기에 무조건 걸어야만 바이마르와 호흡할 수 있다.

바이마르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리 감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바이마르는 이들에게 영감과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유엔이 1998년 ‘Classical Weimar’라는 이름으로 바이마르 구시가지 전체를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듯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본당이다. 괴테, 실러, 니체, 헤르더 같은 쟁쟁한 고전파들이 이 작은 도시를 유럽 문화의 중심축으로 키워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독일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바이마르에 모여들었고, 그리스 사상가들이 모여든 아테네 학당을 비유, “바이마르 학당”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서너 명 중 하나는 천재라 칭해지는 인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지성들의 집합소였다.

또한 이곳 바이마르에는 독일 민주주의가 깃들어있다. 바이마르헌법이 제정된 곳, 그러기에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정인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도시이다.

어디 그뿐이랴, 예술을 예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건축과 공예, 실생활에 접목시킨 바우하우스(Bauhaus)가 첫 발을 내딛은 곳도 바이마르이다.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 고전주의 대가들과 위대한 사상가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 유럽과 독일 철학과 예술사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긴 이들이 오래 머물렀고, 머물고 싶어 했던 바이마르에는 지금도 그들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대공비도서관에서 구시가지로 조금 내려오면 광장이 나온다. 민주주의 광장(Platz der Demokratie)이다. 이곳 광장은 원래 “영주의 광장(Fürstenplatz)엿으나, 1946년 미국 점령 당시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이름을 딴 민주주의 광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바이마르에 있는 구시가지 인근 광장으로, 일반적으로 바이마르 도시 탐방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현재 바이마르 음악대학(프란트 리스트 음대)으로 쓰이는 웅장한 건물을 배경으로 광장 중앙에는 칼 아우구스트(Karl August)대공의 청동 기마상이 늠름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아우구스트대공 즉위 100주년을 기념하여 1875년 9월 3일 세워졋다.

바이마르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먼저 세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되곤 한다. 아말리아 대공비, 아우구스트 대공, 그리고 괴테이다. 이들이 바이마르를 독일지성의 중심지로 가꾼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광장의 아우구스트 대공 청동 기마상 앞에서 그 두 번째 인물인 칼 아우구스트대공에 대해 살펴본다.

애송이의 위대한 만남

당시 독일은 중앙집권국가이던 프랑스와는 달리 수십 개의 영방(領邦)으로 나뉘어진 상태였고, 바이마르는 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주민이 6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도시였던 것. 그런데 누구보다도 포부가 컸던 26살의 청년 괴테가 이런 바이마르를 찾았다. 바이마르 공국의 최고지도자 칼 아우구스트(Karl August·1757∼1828) 대공의 초청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당시 바이마르가 처한 상황이나 그곳으로 가는 교통사정 등을 감안할 때 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우구스트는 명색 ‘작센 바이마르 아이제나하 공국’의 군주이긴 했으나 실은 18살의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트가 이미 1년 전부터 괴테를 만나려고 프랑크푸르트까지 찾아와 그와 대화를 나눈 사실을 안다면 그의 사람 보는 눈만큼은 대단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마따나 아우구스트는 제대로 된 인재 한 사람만 있으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그의 예상대로 괴테와의 만남은 바이마르를 유럽 문화 중심축의 하나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서양 문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건이 됐다.

10대와 20대 두 애송이의 신선한 만남이 세계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든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괴테 개인에게도 일생 일대의 전기가 됐다.

괴테도 처음엔 바이마르에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니었다. 얼마간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트와 죽이 아주 잘 맞은 데다, 계속해서 은(銀) 광산 개발과 도로 건설, 궁정극장 책임자라는 요직을 두루 맡게 되자 도저히 그의 청을 뿌리치고 떠날 수 없게 됐다. 그는 몇 차례의 여행기간을 제외하고는 83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무려 58년 동안 이 도시에서 살았다.

그는 바이마르를 처음 찾았을 때의 사정을 그의 조수이자 절친한 동료인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들려준 바 있는데, 에커만이 정리한 ‘괴테와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바이마르에 왔을 때 그(아우구스트)는 열여덟 살이었다. 그러나 그때 벌써 큰 나무가 될 눈과 싹이 보였다. 그는 이내 나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됐으며 내가 하려는 일이면 무조건, 그리고 철저히 참여했다. 내가 그보다 여덟 살 위라는 사실이 우리의 관계에 도움이 됐다. 그는 저녁 내내 내 옆에 앉아서 예술과 자연,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좋은 것들에 대해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자주 밤늦게까지 앉아 있었다. 내 소파에서 둘이 나란히 잠든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는 고급 포도주와 같았다. 아직도 강력하게 발효하고 있는.”

괴테는 당시 두서너 편의 문학작품을 써 유명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어설펐고, 무엇보다도 궁정 예법에 서툴렀다. 바이마르 상류계층 인사들은 그런 괴테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와 가까이 하기도 꺼려했다. 그런데 최고지도자인 아우구스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 젊은이를 그처럼 끼고 돌았으니 더욱 미운 오리새끼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트의 귀에도 비난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헤쳐나갔다.

“나는,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과 자신의 양심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기 위해서 일한다.”

아우구스트가 이렇듯 커다란 비전과 용기를 갖게 된 것은 어머니 안나 아말리아(Anna Amalia·1739~1807) 대공비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극한 정성에 힘입은 바 컸다. 그녀는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일찍 여의고 어린 큰아들 대신 섭정할 때도 아들의 교육을 위해 셰익스피어의 전작을 독일어로 번역한 소설가 빌란트를 가정교사로 초빙하는 등 갖은 뒷바라지를 다했다. 또한 바이마르를 당대의 문화도시인 파리나 런던과 같은 도시로 만들고자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을 불러들였다.

덕분에 아우구스트는 어머니보다 예술에 더 심취했다. 그 결과 전도양양한 젊은 괴테를 바이마르로 모셔왔고, 독일 최초의 오페라극장이 세워지고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연주 활동을 하는 등 문화 인프라를 지닌 바이마르를 독일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했다. 독일 지성의 허브(hub)를 구축한 것이다.

바이마르 음악대학((Franz Liszt Musikhochschule)

아우구스트대공 청동상 뒤편에는 웅장한 궁전식 건물이 병풍처럼 서있다. 바이마르 음악대학(Franz Liszt Musikhochschule)이다.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리스트는 순회연주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러시아 제국 황제 파벨 1세의 딸이며 당시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비(아우구스트대공 며느리)였던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대공비의 초청을 받았다.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악장직에 취임하며 1848년 바이마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861년까지 계속된 이 바이마르의 생활은 과거 순회연주자의 삶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후학양성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의 지도하에 한스 폰 뷜로나 카를 타우지히같은 당대의 명연주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는 각지에서 몰려든 신인 연주자들과 작곡가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일일이 응해 주었으며 일 년에 수백 번의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서 연주를 지도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당시 수배명령을 받고 장기간 도피중이었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활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으며 글과 강의를 통해 자주 그의 음악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는 바그너의 몇몇 작품을 연주하고 피아노로 편곡하기도 했는데, 특히 오페라 로엔그린은 리스트의 지휘로 1850년 바이마르에서 초연되기도 했다.

한평생 바쁘게 산 그였지만 아마 바이마르에서의 삶은 그중에서도 가장 바빴을 것이다. 그의 언급에 의하면 1년에 2천통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고 마스터 클래스에서 수백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리스트의 명망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거의 전 유럽에서 편지가 왔으며, 수 많은 작곡가가 직접 악보를 들고 찾아와, 바이마르는 시민보다 많은 수의 피아니스트나 작곡가, 심지어 바이올리니스트까지 모여 북적였다고 할 정도였다.

바이마르음대 건물은 원래 “영주의 집(Fürstenhaus)”으로 지어진 것인데, 1770년부터 건축이 시작되었다. 1774년에 시립 궁전(Stadtschloss)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크게 파손되면서, 당시 아우구스트대공은 공사가 덜 끝난 이 곳에 임시로 거처를 삼게 되었다.

이후 한 때는 의회 건물로, 한 때는 정부 건물로 사용되다가, 1951년부터 음악대학이 이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바이마르 음대는 이 도시에서 활동한 유명 작곡가 프란츠 리스츠(Franz Liszt)의 이름을 따서 프란츠 리스츠 음대(Franz Liszt Musikhochschule)로 부른다. 

바이마르 시민들은 튜링엔 주 수도인 에어프르트가 이니라 바이미르에 음악대학(Musikhochschule)이 설립된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바흐와 바이마르 시대

민주주의 광장 왼편 모퉁이에는 바흐가 살았던 주택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리스트를 기리는 음악대학과 리스트박물관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그 맞은편에 바흐의 휴상이 일반이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위안거리이다.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약 100km 떨어진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다. 18세에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1703년 4월부터 한때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고, 그해 8월에는 아른슈타트의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바흐의 본격적인 바이마르시대 (1708-1717)는 23세 때인 1708년 7월 젊은 대가가 된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이 바이마르 시대는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 곡의 태반이 여기서 작곡되었으며, 비할 데 없을 만큼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로서 그의 이름은 독일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714년에는 궁정악단의 콘서트마스터에 임명되어, 매달 1곡씩 뛰어난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당시의 가장 새로운 음악이었던 비발디 등의 협주곡이 즐겨 연주되었는데, 바흐는 그것들을 열심히 연구하여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이 바흐의 그 후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358호 20면, 2024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