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61)

독일 지성의 허브(Hub) 바이마르(Weimar) ➅

“바이마르를 가보지 않았다면, 현재 독일의 반을 보지 못한 것이다”

바이마르를 걷는 일은 그 자체가 영광스럽다. 거리 어디에도 허투루 지어진 건축물이 없고, 이야기가 깃들여져 있지 않은 장소가 없다. 골목마다 바이마르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상이 세워져 있고, 그들이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기에 무조건 걸어야만 바이마르와 호흡할 수 있다.

바이마르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리 감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바이마르는 이들에게 영감과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유엔이 1998년 ‘Classical Weimar’라는 이름으로 바이마르 구시가지 전체를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듯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본당이다. 괴테, 실러, 니체, 헤르더 같은 쟁쟁한 고전파들이 이 작은 도시를 유럽 문화의 중심축으로 키워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독일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바이마르에 모여들었고, 그리스 사상가들이 모여든 아테네 학당을 비유, “바이마르 학당”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서너 명 중 하나는 천재라 칭해지는 인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지성들의 집합소였다.

또한 이곳 바이마르에는 독일 민주주의가 깃들어있다. 바이마르헌법이 제정된 곳, 그러기에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정인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도시이다.

어디 그뿐이랴, 예술을 예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건축과 공예, 실생활에 접목시킨 바우하우스(Bauhaus)가 첫 발을 내딛은 곳도 바이마르이다.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 고전주의 대가들과 위대한 사상가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 유럽과 독일 철학과 예술사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긴 이들이 오래 머물렀고, 머물고 싶어 했던 바이마르에는 지금도 그들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바이마르 시장광장에서 (2)

중세유럽의 도시 광장들은 시장의 기능이나 종교시설의 광장으로, 또는 시청 앞 광장으로 도시의 중심적 공간을 형성하며 공공의 소통장소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영주의 공지사항이나, 새로운 법률의 공표, 때로는 처형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마녀사냥 시대인 1500년대에는 광장에서 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렇듯 중세 유럽에서의 광장들은 공공의 장소였으며, 그 가운데 광장분수는 시민들의 식수공급원이자, 광장의 장식물로도 활용되었다.

바이마르 시장광장은 원래부터 바이마르 시가지의 중심이었던 곳으로, 지금과 같은 광장이 형성된 것은 16세기 경이다. 광장의 사면을 시청사(Rathaus)를 포함한 아름다운 르네상스 건물들로 둘러싸고, 광장은 시장으로서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바이마르가 나치의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폭격 피해가 상당하였다. 마르크트 광장 역시 폭격으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었는데, 호프약국(Hofapotheke) 건물만 유일하게 폭격을 면하여 500여년의 긴 역사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양파축제(Zwiebelmarkt)

시장광장의 주요 건물들을 살펴보기 전, 바이마르가 자랑하는 양파축제를 먼저 살펴본다.

매년 10월 둘째 주 주말에 열리는 이 양파축제는 튜링엔 주의 최대 민속축제로, 30여만 명이 방문하곤 한다. 올해에는 10월 13일 12시부터 10월 15일 까지 열린다.

1653년 10월 4일 시작되어 올해로 371년째를 맞은 바이마르 양파축제는 인근 지역의 양파를 상인들이 떼어다 바이마르 장터에 와서 팔았던 것이 시초다. 덕분에 바이마르 주민들은 겨우내 먹을 질 좋은 양파를 싼값에 살 수 있었고 인근지역 상인들은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 양파축제는 시장광장 구역만이 아니라 도시 전역이 축제의 장으로 활용됐다. 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자동차 도로에선 양파배(盃)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양파 목걸이를 목에 두르고 양파 주스 컵을 손에 든 관중들이 선수들을 향해 환호하고 격려한다.

꽃으로 장식한 양파다발은 양파축제의 상징이다. 대부분의 수공품 판매상들이 양파다발을 주력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외에도 양파로 만든 인형, 동전 크기 정도의 미니 양파를 엮어 만든 목걸이 등이 축제 방문객들이는즐겨 찾는 기념품이다.

당초 양파축제는 주민들의 식재료로 쓰일 양파를 거래하는 목적이 컸지만 오늘날에는 양파를 매개로 사람들이 먹고 보고 즐기기 위해 찾는다.

괴테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상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 역시도 양파축제의 열렬한 팬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괴테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양파축제가 열리면 매년 예쁘게 장식된 양파다발을 사서 자신의 집무실에 매달아두었다.

시청사(Rathaus)

바이마르 시청은 시장 광장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발코니와 종탑을 갖춘 신고딕 양식의 3층 건물로 바이마르 시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1841년 신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시청사는 시장광장에서는 가장 가장 젊은 건물에 속한다.

1400년경에 같은 자리에 지어진 시청사가 화재로 소실되고, 1583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로 지은 시청사 역시 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지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시청사도 2차 세계대전 후 다시 지어진 것이다.

시청사 중앙의 시계탑 꼭대기에는 하얀 종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종은 총 35개, 모두 마이센(Meißen)의 자기로 만들어진 것으로 1987년에 설치되었다. 하루 네 차례씩 “Sah ein Knab” 멜로디를 연주한다.

시청사는 3층 규모의 석조건물인데, 위층으로 갈수록 층의 높이가 작아진다. 이와 비슷한 형태를 피렌체의 메디치궁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다.

바이마르 시청 현관에는 “봄의 여신”이라는 조각상이 있는데, 이는 궁중 조각가 마르틴 고틀립 클라우어(Martin Gottlieb Klauer)의 작품이다. 바이마르 시장 광장의 궁정 약국 앞에 넵튠 분수(Neptunbrunnen)의 바다 신(넵튠, 그리스 신화에서는 포세이돈) 조각상도 그의 작품이다.

한편 시청사 입구에는 미군 참전자들에 의해 제작된 “1945년 4월 12일 전투 없이 도시에 들어서다”라는 표지판이 부착되어 있어, 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궁정약국(Hof-Apotheke)과 넵툰 분수

Markt 4에 있는 궁정약국은 1567년 개업하여 바이마르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며, 1801년까지는 바이마르에서 유일한 약국이었다.

괴테가 활동하던 시기인 바이마르 고전시대에는법원 의사이자 물리학자인 Wilhelm Heinrich Sebastian Bucholz가 괴테와 함께 과학 실험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2022년 궁정약국은 폐업을 하게 되었고, 2024년 2월 29일부터는 관광안내소(Tourrist Information)fh 사용되고 있다. 관광안내소는 원래 Stadthaus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보수공사 관계로 이곳으로 옮겼고, Stadthaus의 보수공사가 끝나는 2027년 말에는 원래 위치로 돌아갈 예정이다.

궁정약국은 르네상스식 건물로 바이마르 시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궁정양국 전면에는 넵툰분수(Neptunbrunnen)가 있다. 넵튠은 로마신화의 바다의 신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포세이돈이라 불린다.

바이마르에서 가장 오래된 분수이며, 1540년에 처음 언급된 우물에서 물을 길어온 곳이기도 하다. 약 50년 후, 이곳은 바이마르의 문장 동물인 돌사자로 장식된 대표적인 분수가 설치된다. 그러나 41년 동안 바이마르 시장직을 역임한 Jacob Schröter(1529-1612)가 1774년 돌사자상을 궁정 조각가 Klauer가 제작한 삼지창, 돌고래, 소년이 있는 오늘날의 넵툰분수로 모습으로 대체하였다. 되었습니다.

물은 돌고래의 열린 입을 통해 중앙 기둥에서 흘러나오는데, 아래 돌에는 “QUOS EGO”(“내가 너에게 주겠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크라나흐의 집(Cranachhaus)

크라나흐하우스(Cranachhaus)는 바이마르 시장 광장 동쪽, 시청 바로 맞은편에 있는 거의 동일한 두 개의 르네상스 주택 왼쪽에 ​​있다.

크라나흐(Lucas Cranach,1472-1553)는 독일 르네상스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명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일에서는 대표적 화가로 손꼽힌다.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인 아버지 크라나흐는 마지막 해를 크라나흐하우스에서 보냈다. 1552년 80세의 나이로 바이마르에 온 아버지 크라나흐는 1553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아버지와 이름이 같다)와 함께 시장광장에 있는 크라나하의 집(Cranachhaus)에서 살았다.

아버지 크라나흐는 이 시기 집에 작업장을 차리고 두 명의 제자를 받아들였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활동적이었고 그의 작업실(지붕 아래 다락방)에서 유명한 세 날개 제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현재 바이마르 시의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Herderkirche)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1555년 그의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Younger)에 의해 완성되었다.

기둥, 조개 벽감 및 아치형 장식품으로 풍부하게 장식되어 쉽게 눈에 띄는 크라나하의 집은 약 1500m² 규모로 대표적 르네상스 건물로도 위미가 크다. 건축 기간은 1547년부터 1549년까지였다고 한다.

크라나흐의 집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나중에 원래 모습대로 재건되었다. 건물 정면 입구 위에는 “이 집에서 Lucas Kranach가 1552년부터 1553년 10월 16일에 죽을 때까지 살았었다”라고 쓰여 있다.

튀링어 부어스트

바이마르에서 가장 많이 보는 것은 어쩌면 “튜링어 부어스트”일 것이다.

독일은 어느 고장을 가든 소시지(Wurst)의 천국이다. 각 지방마다 고유의 부어스트 조리법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튜링엔(Thüringen) 지방 역시 부어스트가 유명한데, 아마도 독일에서 가장 먼저 부어스트 요리가 시작된 곳도 튜링엔일 것으로 역사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다.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가장 먼저 등장하기 때문이다.

튜링엔 지방의 부어스트는 그 이름 그대로 튜링어 부어스트(Thüringer Wurst)로 부른다. 다른 지방보다 부어스트가 길고 두꺼우며, 겉이 살짝 탈 정도로 바삭하게 굽는 것이 특징이다. 부어스트를 끼워 먹는 빵은 차이가 없으므로 다른 지역보다 빵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부어스트가 길다.

튜링어 부어스트는 에르푸르트(Erfurt)나 아이제나흐(Eisenach) 등 다른 튀링엔 지방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바이마르 시민들이 유난히 튜링어 부어스트를 자라하는 것은 그들의 바이마르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온다.

1차세계대전에서 패한뒤, 독일은 1919년 바이마르공화국으로 거듭나는데, 이 당시 그동안의 제후국들은 모두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로 재편되어, 17개 주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튜링엔 주의 주도는 오늘날에는 에푸르트이지만, 당시에는 바이마르가 튜링엔 주도로 선정되었다.

그러기에 바이마르 시민들은 여전히 바이마르가 튜링엔 중의 심장이라고 여기고 있다.

사진:

3: 왼쪽 건물이 ‘크라나흐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