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65)

바이마르를 걷는 일은 그 자체가 영광스럽다. 거리 어디에도 허투루 지어진 건축물이 없고, 이야기가 깃들여져 있지 않은 장소가 없다. 골목마다 바이마르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상이 세워져 있고, 그들이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기에 무조건 걸어야만 바이마르와 호흡할 수 있다.

바이마르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리 감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바이마르는 이들에게 영감과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유엔이 1998년 ‘Classical Weimar’라는 이름으로 바이마르 구시가지 전체를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듯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본당이다. 괴테, 실러, 니체, 헤르더 같은 쟁쟁한 고전파들이 이 작은 도시를 유럽 문화의 중심축으로 키워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독일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바이마르에 모여들었고, 그리스 사상가들이 모여든 아테네 학당을 비유, “바이마르 학당”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서너 명 중 하나는 천재라 칭해지는 인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지성들의 집합소였다.

또한 이곳 바이마르에는 독일 민주주의가 깃들어있다. 바이마르헌법이 제정된 곳, 그러기에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정인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도시이다.

어디 그뿐이랴, 예술을 예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건축과 공예, 실생활에 접목시킨 바우하우스(Bauhaus)가 첫 발을 내딛은 곳도 바이마르이다.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 고전주의 대가들과 위대한 사상가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 유럽과 독일 철학과 예술사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긴 이들이 오래 머물렀고, 머물고 싶어 했던 바이마르에는 지금도 그들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바이마르 헌법: 독일 민주주의 바이마르에서 꽃피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제정이 붕괴된 독일에 최초의 공화국이 탄생했다. 1919년 1월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해 치러진 보통·평등·직접·비밀·비례선거로 선출된 국민의회는 정치적 소요가 심했던 수도 베를린을 피해 바이마르에서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바이마르는 괴테와 실러, 니체와 리스트가 활동했던 인본주의적 전통이 숨 쉬는 문화도시다. 당초 국민의회는 에어푸르트에서 회의를 열려 했으나 군사적으로 방어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바이마르로 장소를 바꿨다. 하마터면 헌법의 이름이 바뀔 뻔했던 것이다.

당시 회의는 바이마르국립극장에서 열렸다.

바이마르국립극장

바이마르국립국장

바이마르국립극장은 괴테와 실러의 동상으로도 유명하지만, 바이마르헌법의 탄생지로서도 그 의미가 매우 높다.

바이마르국립극장은 1791년 기존의 연극 상연장을 아우구스그트 대공의 뜻에 따라 궁정극장(Hoftheater)로 재개관하게 된다. 괴테가 궁정극장으로 개관한 1791년부터 1817년까지 26년간 감독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2차 세계대전 중 피해를 입었다가 1948년 다시 재개관하였다. 재개관 작품도 괴테의 <파우스트(Faust)> 이다.

괴테가 극장장이었을 때, 작센-바이마르-아이젠나흐의 대공이었던 카를 아우구스트의 야박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국립극장의 재정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래퍼토리를 꾸리는 괴테의 안목은 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던 것 같다.

문학 작품을 쓰거나 자신이 관심 있었던 광학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고 싶었던 괴테는, 실러의 동의 없이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차기 극장장으로 실러를 추천했다. 하지만 실러가 과거 뷔르템베르크의 대공 카를 오이겐을 배신하고 탈영해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은 괴테의 사임 요청이 탐탁지 않았거니와, 실러를 천거한 것 역시도 마음에 들지 않아 크게 노하며 반려했다고 한다.

정식으로 극장장 직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쉴러는 그 이후로 괴테의 극장장 업무를 분담하며 바이마르 국립극장의 운영을 도왔다. 행정업무는 괴테가, 각색이나 연출, 연습 등의 실무는 실러가 맡는 형식으로 사실상 공동감독으로 운영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바이마르국립극장은 정치중심지로서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국립극장 한편에 바이마르헌법이 이곳서 제정되었다는 동판이 설치되어있다.

1919년 2월 6일부터 8월 11일까지 새로 출범한 공화국의 헌법을 채택하기 위해 의원들이 극장에서 회의를 하고, 바이마르헌법을 제정한 곳도 이곳 바이마르국립극장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튀링겐 주 정부의 용인으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1924년부터 이곳에서 당 회의를 열어왔고, 금지령이 해제된 후 1926년에 첫 번째 NSDAP 전당대회가 열린 곳도 이곳 바이마르국립극장이었다.

더욱이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바이마르 공화국 몰락의 장본인인 아돌프 히틀러였다. 바이마르헌법 탄생 10주년인 1929년 나치당 연설에서 히틀러는 당시 독일 체제를 바이마르의 공화국(Republik von Weimar)이라고 칭했고, 이것이 함의하는 뉘앙스 역시 ‘혐오스런 현 체제에 제국(Reich)같은 신성한 말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정식 국호는 이전 독일 제국과 똑같은 독일제국(Deutsches Reich)이었다

이렇게 명명된 ‘Weimarer Republik, 즉 바이마르 공화국’ 명칭은 이후 독일을 포함, 전 세계에 ‘가장 민주적인 정체’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상 최악의 전범이 당시 체제를 폄하하며 붙인 명칭이 가장 찬사를 받는 명칭이 되었다는 것이 무척 역설적이다.

바이마르국립극장은 2차 세계대전 후 재건된 최초의 독일 극장이었으며 1948년 8월 괴테의 파우스트 공연으로 재개관했다.

1949년 8월 28일, 괴테 탄생 200주년을 맞아 바이마르 명예시민이 된 토마스 만(Thomas Mann)은 독일인들에게 유명한 연설을 한 장소도 이곳 바이마르국립극장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Haus der Weimarer Republik)’은 바이마르국립극장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곳은 1994년부터 바우하우스 박물관(Bauhaus Museum)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9년 새로운 바우하우스박물관이 개관되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으로 2019년 7월 개관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집

2019년은 바이마르 헌법 제정 10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였다. 2013년 창립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인식을 제고한다는 목표를 추구해온 ‘바이마르 공화국 협회 e. V’는 2018년 11월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당시 건물 소유주인 바이마르 시는 “국가 도시 개발 프로젝트” 프로그램으로부터 연방 자금을 지원 받았는데, 이 프로젝트에는 연방 내무부에서 300만 유로, 도시 개발 자금에서 약 60만 유로를 포함하여 약 390만 유로가 투자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은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채택, 독일 민주주의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한 전시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바이마르헌법: 자유·민주·복지국가의 초석 다져

바이마르 헌법은 당시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헌법이자 현대 복지국가의 초석까지 다진 헌법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는 독일에는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만들어진 바이마르 헌법은 독일은 물론, 인류 전체에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었다.

헌법은 총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편에서는 국가의 구성과 각 직책과 헌법기관의 권한을 규정하고 있고, 2편에서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 국가 운영의 기본 방향에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당시만 해도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를 일종의 미수복 영토로 보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의 통일을 염두에 둔 조항(제2조, 제61조 2항)을 두고 있었다.

바이마르 헌법이 얼마나 현대적이었냐면 세계 최초로 사회권을 규정하여, 국민을 위한 적극적인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당시 대부분의 서방 국가에서 여성에겐 투표권이 없거나 제한적이었지만, 바이마르 헌법은 여성의 투표권과 참정권을 보장하였다. 게다가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정당 결성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영장 없이 구속 금지, 전화 도청이나 서신 검열 금지, 검열로부터의 자유가 있었다. 이때가 1920년대 이전이란 걸 감안했을 때 이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그러나 때가 안 좋았다. 독일은 승전국들의 무지막지한 압박에 시달렸고, 내부적으로는 정치권이 극좌에서 극우에 이르기까지 분열되어 싸웠다. 1929년 터진 대공황은 독일을 더욱 곤경으로 내몰았다. 결국 이 훌륭한 헌법 체제는 히틀러의 등장으로 14년 만에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대의 재앙인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헌법 초안 작성은 법률가이자 좌파 정치인이었던 후고 프로이스가 주도했고,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참여했다. 국민의회는 7월 31일 새 헌법을 의결했고 초대 대통령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8월 11일 이를 공포했다. 국민주권을 기초로 한 바이마르 헌법은 기본권으로 언론·집회·신앙·양심의 자유를 인정하고, 사회권으로 의무교육과 사회보장제, 노동력 보호 등을 규정했다.

고전적인 자유민주주의를 기초로 삼으면서도 근대 헌법 사상 처음으로 소유권의 사회성, 재산권 행사의 공공성,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생존권을 규정했다. 바이마르 헌법이 20세기 현대 헌법의 전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바이마르 헌법 체제가 지속된 시기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음악가 아르놀트 쇤베르크, 소설가 토마스 만,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이트, 미술가 바실리 칸딘스키 등이 활약하며 독일 문화의 정수를 꽃피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은 자체로 취약성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하원이 신임을 철회하면 총리와 장관들은 즉각 사임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각 정당들은 자신들의 정치 투쟁을 목적으로 불신임을 남발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14년 동안 21개의 내각이 들어서는 정치적 혼란이 초래됐다. 대통령에게 총리임면권, 의회해산권, 긴급명령권 등 너무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것도 문제였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나치 정권을 성립시켰고, 이는 바이마르 헌법과 공화국의 종말로 이어졌다.

1383호 20면, 2024년 10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