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66)

독일 지성의 허브(Hub) 바이마르(Weimar) ⑪

“바이마르를 가보지 않았다면, 현재 독일의 반을 보지 못한 것이다”
바이마르를 걷는 일은 그 자체가 영광스럽다. 거리 어디에도 허투루 지어진 건축물이 없고, 이야기가 깃들여져 있지 않은 장소가 없다. 골목마다 바이마르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상이 세워져 있고, 그들이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기에 무조건 걸어야만 바이마르와 호흡할 수 있다.
바이마르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리 감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바이마르는 이들에게 영감과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유엔이 1998년 ‘Classical Weimar’라는 이름으로 바이마르 구시가지 전체를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듯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본당이다. 괴테, 쉴러, 니체, 헤르더 같은 쟁쟁한 고전파들이 이 작은 도시를 유럽 문화의 중심축으로 키워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독일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바이마르에 모여들었고, 그리스 사상가들이 모여든 아테네 학당을 비유, “바이마르 학당”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서너 명 중 하나는 천재라 칭해지는 인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지성들의 집합소였다.
또한 이곳 바이마르에는 독일 민주주의가 깃들어있다. 바이마르헌법이 제정된 곳, 그러기에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정인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도시이다.
어디 그뿐이랴, 예술을 예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건축과 공예, 실생활에 접목시킨 바우하우스(Bauhaus)가 첫 발을 내딛은 곳도 바이마르이다.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 고전주의 대가들과 위대한 사상가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 유럽과 독일 철학과 예술사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긴 이들이 오래 머물렀고, 머물고 싶어 했던 바이마르에는 지금도 그들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우리는 바이마르국립극장 앞에서 독일 고전주의와 바이마르 공화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국립극장에서 바우하우스박물관 그리고 바이마르역가지 이어지는 Heirich-Heine 거리를 따라 양 옆으로 펼쳐지는 바이마르의 명소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비툼궁전: 바이마르의 빛나는 별 안나 아말리아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Haus der Weimarer Republik)뒤편으로 아담한 궁전이 보인다. 바로 비툼궁전(Wittumspalais)으로 아우구스트공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마친 아말리아가 1807년 사망할 때가지 거주했던 궁전이다.

브라운슈바이크 볼펜뷔텔 공국의 공주로 태어난 아말리아는 프랑스 문화에 경도되어 있던 프리드리히 2세의 질녀였다. 그녀는 바이마르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와 결혼함으로써 바이마르와 인연을 맺었다. 초상화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우아하고 사랑스런 여인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예술적 소양을 이어받은 그녀는 연극과 음악을 사랑한 기품 있는 부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함께한 시간은 불과 2년 반 남짓한 시간이었다. 1758년 5월 28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젊은 부인과 두 아들을 남긴 채 유명을 달리 했다. 당시 왕위를 계승할 카를 아우구스트는 겨우 8개월 25일 된 갓난아이였다. 이 아이가 공국의 지배자가 되기까지 모후인 안나 아말리아가 섭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16년이 흐른 1775년 9월 3일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아우구스트 왕자는 어머니의 섭정에서 벗어나 명실 공히 영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때 아말리아는 서른 여섯이었다.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예술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아말리아는 섭정을 마친 후 문화적인 활동에 헌신했다. 그녀는 프리드리히 2세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 사상을 격의없이 받아들였고,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여 작은 공국인 바이마르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 했다. 그녀는 바이마르 궁정에 살롱문화를 발전시켰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살롱 문화가 독일에서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한 것은 프로이센의 3대 국왕이었던 계몽군주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왕 즉 프리드리히 2세 때였다. 계몽 전제군주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포츠담에 있는 ‘근심이 없는 성’이란 뜻의 상수시(Sanssouc) 궁에 저명한 예술가와 학자들을 모아 문학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임은 주로 남성 위주의 닫힌 모임으로 여성들은 철저히 제외되었다.

당시 프로이센 여성들이 거처하는 곳은 3K 즉 교회(Kirche), 아이(Kinder), 부엌(Küche)이었다. 그런 시대에 아말리아는 1774년부터 1807년까지 거주했던 비툼 궁전에서 월요일마다 독회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에는 남녀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다.

비틈 궁전은 바이마르의 문화 중심지였다. 이 비툼궁전에서 매주 월요일이면 당대 최고의 지성, 4대 지성이라 불리던 빌란트, 헤르더, 괴테, 쉴러와 많은 지식인들이 모여 독서와 만찬을 즐겼고, 노래와 연극 등을 무대에 올렸다.

훔멜 음악학교

다시 길을 건너와 바우하우스박물관 방향으로 걷다보면 훔멜음악학교(Musikschule Johann Nepomuk Hummel)가 나온다.

훔멜(Johann Nepomuk Hummel)은 생전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괴테의 추천으로 바이마르 궁정 음악감독까지 오르게 되는 당대 실력파 음악가였다. 또한 대부분의 음악가들과는 달리 부자가 되기까지 하였다.

훔멜이 어느 정도로 음악 재능이 출중하였는가 하는 것은 모차르트는 그를 그의 집으로 데려가 무료 음악 레슨을 제공했을 정도였다. 10살 때인 1788년부터 1793년까지 아버지와 함께 덴마크와 영국으로 콘서트 투어를 떠나기도 하였다. 또한 1813년에 그는 오페라 가수 엘리자베스 뢰켈(Elisabeth Röckel)과 결혼하였는데, 그의 결혼증인 중 한 명은 영화 ‘아마데우스’로 잘 알려진 모차르트의 경쟁자 안토니오 살리에리였을 정도였다.

괴테의 추천으로 1819년에 훔멜은 아우구스트 대공에 의해 바이마르의 궁정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여기서 나중에 빌헬름 1세의 아내로서 독일 황후가 된 그의 손녀 아우구스타를 가르쳤다.

훔멜은 1837년 10월 17일 바이마르에서 사망했으며 바이마르의 역사적인 묘지(Der Historische Friedhof)에 괴테, 쉴러와 함께 묻혀있다. 아울러 바이마르국립극장 뒤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이렇게 생전에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화려한 경력과 바이마를 상징하는 음악가로 부와 명예를 맘껏 향유한 훔멜은 그의 사후 뜻하지 않은 경쟁자를 만나게 되고 말았다. 바로 프란츠 리스트였다. 그 결과 오늘날 바이마르 음악대학의 이름이 프란츠리스트 음악대학으로 결정되었다.

바이마르 시는 1956년 음악대학의 이름을 프란츠리스트 음악대학으로 결정한 뒤, 1966년에는 훔멜을 기리기 위해 훔멜음악학교를 세웠다. 자신의 결혼증인이었던 살리에르의 운명을 따르게 될 줄을 훔멜은 아마 상상도 못 하였을 것이다.

성 야콥 교회

사간이 넉넉한 방문객들에게는 훔멜음악학교를 건너와 골목 안쪽 깊숙이 들어가면 Rollplatz 4번지에 위치한 성 야콥 교회(St. Jakobskirche) 방문을 적극 추천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그마한 평범한 교회로 보인다. 내부에도 화려한 조각이나 제단도 없고, 그저 안뜰에 이끼 낀 낡은 무덤들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눈에 띄는 사건이 있다. 바로 대문호 괴테(Goethe)가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 그리고 교회 오르간의 제막식에 바하(J.S.Bach)가 참석했다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심지어 이 조그마한 교회가 왕실 지정 교회가 되기도 했다.

바이마르의 옛 성벽이 놓이면서 이 교회가 성벽 밖에 위치하게 되자 붕괴 위험 때문에 철거하였는데, 철거 다음해에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교회가 지어졌으며, 시립 궁전(Stadtschloss)이 대화재로 피해를 입자, 성 야콥 교회가 왕실 교회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내부 역시 바이마르를 휩쓸었던 고전주의의 영향이다. 작고 평범한 교회라고 무시하기에는 특별함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시립박물관

다시 훔멜음악학교로 돌아온다. 훔멜음악학교에서 조금만 바우하우스박물관 방향으로 이동하면 시립박물관(Stadtmuseum)이 나온다.

1780년부터 1803년까지 두 단계에 걸쳐 건축된 이 고전주의 주거용 및 상업용 건물은 괴테 시대 바이마르의 고객이자 작가, 출판사이자 가장 중요한 기업가인 프리드리히 저스틴 베르투흐(Bertuch 1747~1822)의 주택으로 지어졌다.

이 바이마르시립박물관은 원래 1889년 6월 24일 자연과학회의 주도 하에 자연과학 박물관으로 설립되었다. 1892년 공간 부족으로 인해 튀링겐 선사 및 초기 역사박물관이 위치한 포제크 하우스로 이전했고, 1903년 시정부에 인수되면서 튀링겐 최초의 시립 박물관이 되었다. 그리고 60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인 1955년부터 바로 이 건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 시립박물관에는 바이마르의 도시 역사와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이를 통해 바이마르시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쉴러가 그의 친구 Christian Gottfried Körn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쉴러는 이 집이 바이마르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라고 묘사하며, 이 편지에서 본 건물과 그 뒤에 있는 정원, 그리고 그 용도에 대한 매우 상세한 평가를 남겼다.

계속해서 길을 따라 걷다보면 바이마르회의장(congress centrum weimarhalle)이 나온다. 이 회의장은 원래 1931년에 건설된 역사적인 건물이었으나, 1997년에 철거되었고 1999년에 현재의 건물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바이마르회의장은 바이마르가 유럽 문화 도시였던 1999년 6월 26일에 개장되었으며, 미국 연극 기술 연구소(USITT)로부터 “Honor Award 2001”을 수상한 바 있다.

바이마르회의장 옆에는 바우하우스 탄생 100주년인 2019년 개장한 바우하우스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다음 회에서 우리는 이곳에서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1384호 20면, 2024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