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71)

라이프치히: 구시가지 골목 모두가 역사의 현장

라이프치히(Leipzig)는 2차 세계대전 전만 하더라도 독일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1915년 완공된 라이프치히 중앙역은 당시 유럽 최대 규모였으며, 1930년대에 인구가 70만명에 이른 독일의 손꼽히는 대도시로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독일의 교육, 상업, 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라이프치히는 안타깝게도 동서독 분단 시기를 거치며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0년 독일통일 후에 독일 정부와 라이프치히 주민들의 노력으로 라이프치히는 지난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상상력을 통해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왔다. 구동독 지역은 어둡고 위험하다는 여전히 존재하는 선입견의 장벽을 허물어트릴 만큼 매력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예부터 출판업이 발달하였고 높은 수준의 오페라 극장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 전통은 남아있어 독일 내에서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 중 하나로 꼽힌다. 독일의 대표적 음악가인 바흐(J.S.Bach)의 고장이기도 하다.

라이프치히는 괴테가 ‘작은 파리’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던 도시로도 유명하다. 젊은 시절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수학했던 괴테는 훗날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생각과 마음이 맞는 지식인들과 한 도시에 모여 살며 교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며 당시 라이프치히에서의 삶을 회상했다.

이와 더불어 독일 분단 시절, 구 동독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열려 통일의 초석을 놓은 도시라는 점은 오늘날까지도 라이프치히 시민들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시장 광장

구 시청사(Altes Rathaus)와 옛 건물들에 둘러싸인 시장광장(Marktplatz)은 구 시가지의 중심으로 많은 행사와 시장이 열린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은 신구 조화가 매우 뛰어나 여러 시대의 여러 양식의 건물들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튀지 않은 채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구 시청사 외에 유명한 건물은 구 계량소(Alte Waage). 1555년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등이 있다.

주요 유적과 문화명소가 이 이 광장을 중심으로 각 방향으로 펼쳐있어, 독자분들은 시장광장을 라이프치히 역사산책의 중심축으로 삼으면 된다.

구시청사

르네상스 양식의 라이프치히 구 시청사(Altes Rathaus)는 좁고 긴 2층짜리 건물이며, 중앙 시계탑은 다소 비대칭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이 지어진 것은 1500년대. 당시 시장이었던 히에로니무스 로터(Hyeronimus Lotter)는 기존에 있던 시청사 건물이 파손되자 당장 새로운 시청을 지으라고 서둘렀고, 당시 기술로는 매우 드물게 9개월 만에 신축된 건물이 바로 지금의 구 시청사이다. 원래 있던 건물의 터 위에 새로운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독특한 복층 구조의 건물이 되었다. 

시청사 내부는 현재 라이프치히의 역사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구시청사는 라이프치히의 랜드마크이며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건물 중 하나로 여겨지는데, 2층 규모로 길이 93m로 건물의 높이보다 길이가 더 긴 것이 특징이다.다.

지하에 있는 오래된 감옥의 유적부터 1층의 역사적인 방과 탑에 이르기까지, 구시청사는 라이프치히 도시 역사의 개요이자 가장 가치 있는 박물관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카페바움

시장광장에서 조형박물관을 마주보고 왼쪽으로 뻗어있는 Kleine Fleischergasse의 4번지에는 카페바움이 자리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춤 아라비셴 카페 바움(Zum Arabischen Coffe Baum)이고, 라이프치히에서는 애칭으로 카페바움(Coffe Baum 또는 Kaffeebaum)이라고 불린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카페이기도 하다.

바그너와 실러가 단골이었던 카페, 그리고 괴테, 리스트, 슈만, 말러, 나폴레옹, 근래에는 슈뢰더 독일 전 총리, 호스트 쾰러 전 독일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까지 독일의 유명 음악가, 문인, 정치인, 여러 분야 지식인들이 커피를 마시러 왔다는 이 유서 깊은 카페는 1711년부터 사람들에게 커피를 공급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카페바움(Zum Arabischen Coffe Baum)’이 있는 건물의 역사는 그보다 150년 전인 1556년에 이미 의회 책에 언급되었었기에 이 건축물의 역사는 450년이 넘는다고 볼 수 있다.

차분하면서도 역사가 느껴지는 앤티크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는 실내는 각 증별로 맥주홀, 레스토랑, 카페, 박물관으로 구분되어 운영되고 있다.

건물 2,3 층에 있는 ‘박물관’은 라이프치히 시사 박물관의 일부로 독일과 라이프치히 커피 문화 역사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16개의 작은방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에는 300년 동안 사용되어 온 커피 분쇄기, 원두, 커피 컵, 로스트 장치… 등 500여 점이 넘는 커피 관련 전시물로 채워져 있는데~ 그중에는 1813년 나폴레옹이 커피를 마셨던 컵과 로스팅 도구도 포함되어 있다

리모델링을 위해 2019년부터는 폐쇄되었는데, 2025년 6월 경 새로이 개장한다고 한다.

커페바움에서 Dittrichring을 따라 내려오면 코마스교회가 보인다.

바흐, 라이프치히에 오다

바흐가 평생 거쳐 간 도시는 경력의 흐름으로 볼 때 크게 8곳 정도 되는데, Eisenach, Ohrdruf), Lüneburg, Weimar, Arnstadt, Mühlhausen, Cöthen 그리고 바로 라이프치히다. 꽤 많은 지역 같아 보이지만, 독일 북부 함부르크 근처인 뤼네부르그를 제외하면 모두 바흐가 태어난 아이제나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힘 있는 궁정에서 황제와 귀족을 위해 여러 곳으로 거처를 옮겨가면서 국제적으로 활동했던 모습에 비해 바흐의 활동 반경은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다.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cantor)와 음악 감독직은 독일에서 가장 명망 높은 자리 중 하나였고, 바흐는 1723년에 이 직책을 맡게 되면서 라이프치히로 오게 되었다.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가 세상을 떠나면서 공석이 생긴 것인데, 본래 이 자리에는 바흐가 아닌 게오르그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과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Christoph Graupner, 1683-1760)가 물망에 올랐었다. 그러나 텔레만은 더 높은 보수를 제시했던 함부르크로 떠났고, 다름슈타트에 있던 그라우프너도 이직을 거절하면서, 결과적으로 쿠나우의 후임은 바흐가 되었다.

오늘날 바흐의 위상을 생각해볼 때, 바흐가 성 토마스 교회에서 원한 1순위 음악가가 아니었던 사실은 조금 놀랍기도 하다.

Cöthen에서 라이프치히로 온 바흐는 성 토마스 교회를 비롯한 총 4개의 교회의 음악을 책임지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성 토마스 교회 소년합창단의 지휘를 맡았으며, 1729년에는 라이프치히 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연주 단체인 콜레기움 무지쿰(Leipzig collegium musicum)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바흐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동안, 칸타타와 많은 교회음악, 협주곡과 실내악 작품,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르쳤던 학생들을 위한 교육용 곡을 포함한 많은 오르간 곡과 하프시코드 곡을 작곡했다.

라이프치히 이전부터 바흐가 평생 일하며 작곡한 수많은 곡들은 20세기에 들어서 독일의 음악학자인 볼프강 슈미더(Wolfgang Schimieder, 1901-1990)에 의해 분류되고 목록화되어, BWV(Bach-Werke Verzeichnis, 바흐 작품 목록)라는 표시로 목록화되어 통용되고 있다.

성 토마스 교회

성토마스 교회 내부, 중앙에 바흐의 안식처가 보인다.

성 토마스 교회(St.Thomaskirche)는 교회보다 성가대가 더 유명한 곳이다. 토마너 성가대(Thomanerchor)라고도 불리는 토마스 교회 소년합창단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그 수준을 인정받은 최고의 합창단이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이 교회의 지휘자로 25년 동안 활동하면서 합창단을 함께 지휘하였고, 합창단을 위한 곡도 많이 만들어 오늘날까지 불리는 명곡이 많다.

성 토마스 교회는 1212년 건립되었고,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Thomanerchor) 역시 이때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교회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받아들여진 모습으로 14-15세기를 지났는데, 지금의 모습은 1884-1889년 사이에 있었던 교회 재건 사업을 통해 재정비되어 고딕 양식으로 보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흐가 1723년부터 1750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을 책임졌기 때문에, 교회에는 바흐를 기리는 곳으로 가득하며, 그의 악보와 일부 악기들은 교회 내부 작은 전시실에서 관람도 가능하다.

성 토마스교회 앞 광장에 세원진 바흐 동상

먼저, 성 토마스 교회 내부에는 바흐의 무덤이 있다. 하지만 본래부터 이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흐의 유골은 성 요한 교회(Johanniskirche)에서 1894년에 발견되어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교회가 전쟁에 파괴되는 바람에 1949년 성 토마스 교회로 옮겨졌고, 다음 해인 1950년 바흐 서거 200년을 기념하여 무덤이 이 곳에 만들어진 것이다..

바흐의 무덤 너머로 보이는 대리석과 설화 석고로 된 세례반은 1614-1615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기에서 바흐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 1701-1760)와 그녀와 바흐 사이의 11명의 아이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맨 뒤쪽에 화려한 금장식으로 되어있는 것은 신고딕풍의 예수 제단으로, 건축가인 콘스탄틴 리프시우스(Johannes Wilhelm Constantin Lipsius, 1832-1894)가 1888년에 만든 것이다.

리프시우스가 성 토마스 교회에 만든 또 다른 것은 서쪽으로 나있는 문인데, 이 문은 1936년 전쟁에 부서졌다가 2008년에 복원되었고 2009년 멘델스존 탄생 200년을 기념하여 이때부터 ‘멘델스존 문'(Mendelssohn portal)으로 불리게 되었다.

남쪽에 있는 바흐 창문은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뮌헨 출신의 스테인드 글라스 아티스트이자 화가인 카를 부쉐 (Karl de Bouché, 1845-1920)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 토마스 교회의 모든 역사적 요소들이 J. S. 바흐에 대단히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성 토마스 교회는 바흐와 함께 역사를 이어나가는 모습이다. 이 모습에 좀 더 보태자면, 바흐 이전에는 1519년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와 요한 에크(Johann Eck, 1486-1543) 사이에 시작된 논쟁(일명, 라이프치히 논쟁)으로 인해, 1539년에 마틴 루터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설교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흐 이후로는 모차르트가 1789년 12월, 오르간 연주를 했다고 전해지며, 1841년 4월에는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수난곡>(Matthäuspassion)을 연주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성 토마스 교회의 800년이 넘는 긴 역사, 그중에서 바흐가 차지하는 27년은 결코 길지 않다. 하지만, 바흐가 라이프치히와 성 토마스 교회에 남긴 음악과 흔적은 분명 적지 않은 무게를 갖고 있다. .

교회 내부와 박물관은 무료 입장, 그리고 교회 첨탑은 주말에만 가이드를 동반한 유료 입장만 가능하다.

1393호 20면, 2025년 1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