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섭
하회마을에 있는 ‘북촌 댁’을 숙소로 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래 동안을 고민하면서 망설이게 된 이유는 숙박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비쌀 만한 이유(값어치)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예약을 강행키로 했다.
당일 1박을 하기 위해 북촌 댁에 당도한 우리일행은 빈집처럼 흐르고 있는 적막에 기절초풍했다. 들여다보는 안마당에도 불 꺼진 집안 어디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인기척은 없었다. 예상했던 거창한 숙소(호텔)도 아니었고, 주인장도 없는 빈집에 쓸쓸한 고요만이 가득했다. 대문에는 사람의 출입을 막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져 있었고 경고문처럼 보이는 안내문(?)이 쓸쓸하게 붙여있었다.
나는 도깨비한테 홀린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어두운 밤에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볼 정신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람을 찾아 골목을 돌았고, 다른 가족들은 적혀 있는 안내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주인장을 찾고 있었다.
골목을 돌다 한참 후에 돌아오니, “우여곡절 끝에 주인장을 만났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극적인 만남에 우선 안도의 한숨이 나왔고, 나중에 주인장의 설명을 들어보니 “숙소는 세 가족까지만 예약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며 “선택된 적은 숫자의 숙박 객에게 옛 고택에서의 아늑한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엔 우리가족 5명의 예약이 들어오자,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아예 더 이상의 예약을 받지 않고, 우리가족만 편안하게 하룻밤을 지내도록 배려했다”며 웃는다. 그러고 보니 72칸의 북촌 댁 전체를 우리가족이 전세 낸 셈이 되었다.
저녁식사는 옛날에 지체 높은 분들이 먹었던 식사처럼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있었고, 기품이 서린 당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식사도 그랬다. 진수성찬은 아니었지만, 정성과 단정함을 느끼게 하는 품위가 있어 먹는 데에도 조심스러울 정도다. 방은 이중 미닫이문과 이중 벽으로 되어 있었고 창문도 덧문으로 되어 있어 외풍을 막아주었고, 온돌방은 부엌에서 불을 지핀 다음 아궁이를 막아 방바닥이 식지 않도록 신경을 써 은근하게 올라오는 따듯함이 나른하게 온몸의 피로를 상큼하고 깔끔하게 녹여주었다.
다음날 아침식사가 끝나자 집 구조를 설명해주는 안내가 시작되었다. 옛 소품과 관대, 유물들이 방마다 가득했다. 옛 물건들 중엔 새롭고 신기한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들이 많았다. 그 옛날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유물들이 바로 그 자리에 있어 보는 감동이 더욱더 컸다. 벽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2007)했을 때의 사진도 걸려 있었고, “2019년 4월엔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도 있었다”고 자랑했다. 박물관보다는 몇 배가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색이 나도 조선사람인데 한번도 보지 못한 선조들의 유물들과 집 구조는 마치 살아있는 교과서와도 같았다. “아! 이렇게 살았었구나”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한옥의 설명은 더 복잡하다.
정면 7칸에 측면 2칸의 건물로 지어진 북촌 유거(큰사랑 체)는 2칸 방 2개, 1칸 방 1개, 4칸 대청, 3칸 누마루, 3칸의 정지와 그 위에 같은 크기의 다락, 5칸의 퇴, 5쪽의 쪽마루로 되어있었다. 대청마루는 막아져 있는 칸막이를 들어 올려 고리를 위에 있는 못에 걸면 큰 연회석이나 회의공간이 되도록 했다. 이 ‘북촌 유거’는 집안의 어른(할아버지)이 거주하고 활용했던 큰 사랑방이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이었으며, 누마루에서는 동쪽으로 하회마을과 화산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부용대와 낙동강, 남쪽으로는 남산과 ‘병 산’이 보이는 명당자리였다. 특히 뒤뜰에 있는 300년이 넘은 소나무의 생김새가 마치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우측에 마구간이 있고, 좌측은 곳간이다. 곳간이 있었던 곳에는 현재 화장실과 샤워장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으며, 댓돌 위에 준비된 흰 고무신을 신고 마당을 지나야 화장실과 샤워장에 갈 수 있다. 번거롭지만 흥미롭다.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버티고 있는 커다란 건물이 ‘화경당’이다. 그 ‘화경당’에서 우리가족 5명이 중간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로 나누어 자게 했다. 우리 몫은 작은 사랑채다. 화경이란 가족과 친족간에 화목을 도모하라는 뜻이다. “작은 사랑채는 손자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안채로 드나드는 쪽문을 두어 수시로 안채의 어머니께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랑의 문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중간사랑채는 아버지가 기거하는 곳이다. 현재의 집주인은 류세호씨로 류이좌 선생의 8대손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징비록으로 유명한 서애 류성룡 선생의 15대손이 된다. 뒤로 이어지는 다음 건물은 안채와 안방이다. 방 하나를 4개로 나누어 자는 곳, 책 읽는 곳 등으로 구분했다.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액자 속 붉은 호패는 류세호 씨의 7대조로 정조대왕으로부터 받은 과거합격증이다. 17.000여 점을 한국진흥원에 기탁대여를 해주었고, ‘북촌 댁’에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도 수천 점이 넘는다고 했다. 경찰서, 소방서, 시청에 경보장치가 연결되어 있어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주춧돌은 가운데가 조금 패여 있는데, 거기에다가 소금과 고추가루, 나무 재를 담아 기둥에 벌레가 먹어 썩지 않도록 방지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건축방식이라고 했다. “기왓장은 한 개에 5kg의 무게가 나가며 지붕에 있는 기와 전부를 합치면 10톤의 무게가 된다”며, 한옥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엄청나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집을 설명할 때 ‘한 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한다. 우리가 ‘초가삼간’이라고 부르는 노래가사는 우리 말 칸에서 온 말이다. 결과적으로 북촌 댁에서의 비싼 숙박비는 그 값어치가 충분한 대단히 만족할 만한 하룻밤 숙박이었다. 북촌 댁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에 해당된다.
왕이 아닌 일반인들의 집은 100칸을 넘을 수 없다. 한옥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전주사람, 만석꾼))이 1700년대에 처음 짓기 시작한 강릉에 있는 ‘선교 장’이다. 이 집은 10대째 내려오면서 끊임없이 지어 지금의 ‘선교장’으로 102칸이다. 하인들과 목수, 옷을 만드는 장인까지 거느리고 살았던 이 집들을 전부 합치면 300칸이 넘는다. 전라도 평야도 아니고, 경상도 평야도 아닌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만석꾼이 있었다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의 땅은 주문진에서 울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문이 12개, 밥상이 300개였다고 하는 데, 특히 12개의 문 중 ‘평대문’은 여자들과 가족들이 사용했고, ‘솟을대문’은 남자들과 손님들만 사용했다.
금강산에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던 ‘선교장’은 금강산구경을 위해 팔도에서 모여드는 나그네들의 숙소가 되었고, 이들을 꾸준히 대접하는 교류를 통해 문화와 예술의 꽃을 피우는 교두보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보통 집들은 ‘당’이나 ‘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집은 ‘선교장’이라는 ‘장’자가 붙어있다는 것이 다른 집들과 다르다. 열화당은 집안과 학식, 인품을 갖춘 고급손님들의 숙소로 사용되었고, 보통손님은 중간사랑채, 좀 실력이 처지는 손님은 ‘아래 사랑채’에서 자게 했다. 손님들이 떠날 때는 꼭 옷 한 벌씩을 해주어 예의를 다했다고 한다.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참조
2020년 7월 17일, 1179호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