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로 25회] 호스피스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 길

호스피스 방문을 가는 Y 부인은 말기 암 환우다.

호스피스 환우로서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같은 교회를 다니며 알고 지내는 그분은 요리, 행사 준비, 기도, 뭐든지 잘하시는 자매셨다. 한마디로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는 만능 재주꾼이었는데 몇 년 전에 발병한 암을 이겨내지 못하여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계신 지 꽤 지난 상태였다.

코로나가 확산된 이후 사람들이 상호 간의 방문을 삼가고 있었고 특히 면역이 약한 환자가 있는 집은 방문 자체가 위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댁에서도 외부인의 방문을 원하지 않아서 호스피스 동행은 주로 환우의 가족을 집 밖에서 만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호스피스에서는 환우 당사자 뿐 아니라 그 가족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일도 주요 활동 과제이다.

그러다가 Y 부인이 병원에 입원하신 것을 계기로 병원으로 문병을 갈 수 있었다. 마침 병원의 방문객에 대한 규정이 완화된 시점이었기에 병원 입구에서 방문자의 인적 사항을 적고 마스크를 단단히 한 채 가능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Y 부인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대단히 반가워하셨다. 병에 이런저런 이유가 붙어서 독실에 혼자 있어야 한다며 명랑한 목소리로‚ 조용하여 기도하기 딱 좋다‘고 말하며 웃으시는 그분은 1970년에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막 독일로 온 아담하고 예쁜 미인이셨고 애살이 많아 매사에 철저하고 성실하게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셨다.

마침 내가 들고 간 신문에는 정부의 코로나 조치를 반대하는 시위대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는데 우리는 같이 신문을 읽고 코로나로 달라진 세상 이야기도 하고 웃고 기도했다. 내가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내내 생글거리시던 그분이 갑자기 미소를 거두며 내게 말씀하셨다.

“자매님, 사실은 내가 자기에게 고백할 게 있어. 잠깐 더 앉아 내 얘기 좀 들어봐요. 자기는 예전에 우리 성당에 나왔던 삼성 주재원 가족이 기억이 나요?”

“그럼요, 요즘에는 베를린에 삼성 지사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삼성 직원들이 많았잖아요.”

“그때 한 가족이 한국으로 귀국하며 그 집 아이가 쓰던 책가방이 거의 새 거라 적당한 사람에게 물려주고 가려고 성당에 들고 왔었는데 내가 보고 좋아 보여서 받아 갔었어요. 우리 집 애들은 그때 다 커서 필요도 없었는데 아는 집의 아이를 주려고.. 그때 자매님의 아이에게 주려고 가져온 것 같았었는데 내가 가져가서 미안해요.”

“아이고 자매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전혀 기억나지도 않는데요.”

책가방이라니 이게 언제 적 이야기인가?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라면 거의 20년 전이다. 독일의 초등학교 책가방은 우직한 사각형으로 한국의 책가방과는 다르게 생겨 귀국하는 사람들은 가져가지 않는다. 더욱이 이 책가방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어린 동생에게 물려주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기도 했다.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우리 집은 형편이 좋지가 않아 등교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여기저기서 물려받았다. 그러나 책가방은 그 이후에도 물려주는 사람들이 잇달아서 유행을 따라 업그레이드하며 바꾸어 주었던 터라 내 기억 창고 속에 전혀 미련으로 남아있지 않은 항목이었다.

“자매님의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 우리가 책가방을 사줄 수도 있는 형편이었는데 오히려 그 집으로 가야 되는 가방을 내가 중간에 가로채갔어요. 미안해요. 용서해 줘요.”

“어머, 이러지 마세요. 저는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어요. 용서해드릴 것도 없어요. 저야말로 용서를 구하고 싶어요. 평소에 바른 소리로 매사를 조목조목 따지시는 분으로 여겨 어려워했었거든요. 어렵게 여기고 더 다가가지 못한 것을 다 용서해 주세요.”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얼싸안아드렸을 텐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병상 옆에 있는 장의 서랍을 뒤적거리시던 Y 부인은 쿠키 하나를 꺼내서 내 손에 쥐어주셨다.

“뭐라도 주고 싶은데 있는데 점심때 후식으로 나온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네요. 가는 길에 먹어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큰소리로 인사하고 웃는 얼굴로 과자를 받아 나오는데 왜 눈에는 물기가 고이는지 모르겠다.

용서와 화해.

생의 마지막에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이룰 수 있다면 가장 좋을 일이 것이다.

이정미/ 해로 호스피스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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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호 16면, 2021년 3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