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

26회 :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인 S 여사를 방문해 줄 수 없겠냐는 지인의 청이 들어왔다. 사단법인 <해로>는 한국인을 우선하여 돕지만 그렇다고 국적에 따라 차별을 두지는 않는다.

지인이 준 주소를 따라 찾아간 그분은 가족이 없이 요양원에 혼자 계신 치매 환우였다. 무남독녀로 자라 독신으로 평생을 살았기에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고 젊은 시절에는 독일 연방 정부에 근무하며 사회. 환경운동에도 열심이던 인텔리 여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혼자 살았기에 치매가 발병한 후에도 본인이 자각하지 못해 방치되어 있었고 증세가 심해져서 맨발로 밖을 돌아다니게 되자 보다 못한 이웃들이 구청에 신고하고 어찌어찌 먼 친척을 찾아내었고 외국에 사는 그 친척이 와서 이분을 요양원으로 이사를 시키고 집을 정리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전화 연락이 안 되었던 S 여사가 염려되어 그 집으로 직접 찾아간 지인이 주택관리인인 이웃에게서 들은 내용이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 그분은 나에게 중국 사람이냐고 물으셨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5분 뒤에 중국 사람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또다시 물어서 같은 얘기를 10번 정도 반복했었다. 그래도 내 방문을 무척 좋아하여서 나도 즐거웠다. 내가 날씨가 좋다고 말하면 그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척 감동적인 표정으로 “날씨가 좋아요?“라고, 내가 날씨가 춥다고 말하면 그분은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표정으로 „날씨가 추워요?“하고 되물으셨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누구라도 와서 말을 걸어주면 무척 좋아하였다.

가족이 없는 이분에게는 국가에서 지정한 법정대리인(Gesetzlicher Betreuer)이 배정되어 있었다. 그 법정대리인은 우리 단체의 방문에 동의하며, ‚내가 맡기 이전에 다른 회사 소속의 다른 법정대리인이 있었고 후임인 자신은 이미 요양원에 계신 상태의 이분을 만났기에 이 환우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사실은 잘 모른다‘ 고 하였다.

내가 방문하기 얼마 전에 S 여사가 치매 환우에게 종종 나타나기도 하는 음식 거부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요양원과 법정대리인은 환우를 즉시 병원으로 보내 인위적인 영양공급을 위한 튜브를 몸에 설치하게 하였다. 내가 처음 방문한 날은 막 퇴원하신 직후였는데 그분은 다시 아무 문제 없이 식사를 잘하셨다. 그 후로는 방문하는 자원봉사자나 내가 드린 과자도 드셨고 음료도 잘 마시어 몸에 설치한 튜브는 추가적인 영양공급을 위한 보조기구일 뿐이었다.

안타까운 일은 그분이 계시던 요양원이 폐업하면서 일어났다. 법정대리인은 평판이 좋은 새 요양원을 찾아 이사를 시켰는데 그곳에서는 인공영양 섭취 장치를 달고 있는 이분에게 구강을 통한 자연적인 섭생을 금지했다. 이유는 새로 입소한 이분에게 음식을 삼키는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란다. 환우는 이미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언어능력을 잃어버렸고 혼자서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내가 요양원에 ‚바로 며칠 전까지 이전 요양원에서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시는 것을 봤다‘고 말했지만, 구강 전문 의료인의 확인이 있기 전까지는 음식도 물도 절대 줄 수 없다며 로고패디(Logopädie) 치료사의 정기 방문이 3주 후에 있으니 그때 확인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80세가 넘은 말기 치매 환우가 3주 동안 음식을 끊으면 음식을 삼키는 있던 능력도 잃어버릴 것이라는 나의 항변은 통하지 않았다. 모든 권한과 책임은 법정대리인에게 있었고 환우가 만에 하나 음식을 잘못 삼켜서 기도로 들어가면 폐렴이 생길 수 있다는 위험부담을 그 누구도 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S 여사는 그 후로 인공영양에만 의지하여 살았다. 그곳은 평이 좋은 요양원답게 간병만큼은 철저해서 2년 이상 침대에 누워만 지내도 욕창 하나 생기지 않았고 인공영양으로 인해 영양 상태도 우수해 환우의 얼굴빛은 늘 좋았다. 그러나 치매는 계속 진행되었다. S 여사는 마지막 1년 이상을 중얼거리는 소리조차 못 내고, 말을 걸어도 반응을 못 하고, 눈은 허공만 쳐다보는 상태로 지내셨다. 은퇴하기 전까지 정력적으로 환경 운동을 하시던 분이셨다던가. 과연 이분은 자기 삶의 마지막 몇 년을 그렇게 침대에서 꼼짝도 못 하고 누워 생명을 연장받기를 원하셨을까? 그분이 미리 자신의 의사를 표명해 두지 않았기에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사전 의료 의향서(Patientenverfügung)는 본인이 사고나 치매 등으로 스스로가 의사결정을 내리고 이를 표현하기 힘들어질 때를 대비하여 미리 써두는 서류이다. 마지막까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우리 인간은 미래의 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한 일에 서류를 준비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 서류가 꼭 정해진 양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자신의 치료와 간병에 대한 의료행위를 미리 규정하는 것이라 막상 쓰려고 하면 막연하기 쉽다. 그래서 사단법인 <해로>는 이 서류작성을 돕는 상담을 하고 있다. 이 서류에 담겨야 할 기본적인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한국어로 친절히 설명해 드리고 설명을 들은 내담자가 본인이 원하거나 또는 제한하고 싶은 의료행위 들을 알려주면 독일어로 작성을 대행하고 확인 날인까지 해 드린다. 큰 수술을 앞둔 고령자에게는 병원에서 이 서류의 작성 여부를 미리 묻기도 하므로 미리 만들어 두면 긴급할 때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서류이다. 혼자 사시는 베를린 한인 고령자 명단을 수시로 업데이트하는 사단법인 <해로>에서 마음을 쏟고 있는 또 하나의 캠페인이 <사전의료 의향서 작성>이다.   


이정미/ 해로 호스피스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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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호 16면, 2021년 4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