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Was traurig macht)

홍 종 철

1950-1960년대에 고등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은 그 때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위 제목의 글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감수성이 예민하고 풍부한 청소년들의 심금을 울려 주었던 감명 깊은 글이었다.

이 글의 저자는 독일의 작가 ‘안톤 슈낙(Anton Schnack : 1892-1973)이고 이 글을 번역한 이는 김진섭(金晉燮) 수필가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그렇게 유명했던 ‘안톤 슈낙’ 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고국인 독일에서는 별로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다. 나는 1980년대 초에 Frankfurt의 한 큰 서점에 들려 Anton Schnack 작품의 책을 사려고 문의하니 서점 직원들조차 그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한 직원이 작가목록표가 들어 있는 두꺼운 책을 꺼내 와 찾아보더니 그제야 목록에 이름이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사망 30주년인 2003년에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FAZ)은 “안톤 슈낙은 독일문학사에서 대가(大家)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정 받는 작가(作家)였다.” 라는 평을 해 주기도 하였다.

‘안톤 슈낙’은 1892년 바이에른 주의 리넥(Rieneck)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업을 마친 후 신문기자로 있다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하기도 했는데 군 복무 중에 벌써 전쟁에 관한 시와 산문 등을 발표하였다. 1937년부터 그는 주로 프랑크푸르트에 살면서 기자 및 잡지사 편집인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틈틈이 시, 단편소설, 수필 등을 꾸준히 발표하였는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1941년에 발표된 ‘젊은 날의 전설(Jugendlegenden)’ 이라는 수필집에 들어 있는 글이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중이던 1944년에 그는 52세라는 많은 나이임에도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미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었다. 말년에는 프랑크푸르트의 근교도시 카알(Kahl am Main)에 정착하여 살다가 1973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평범한 문필가에 불과했던 안톤 슈낙의 작품에 어떻게 김진섭 수필가가 접하게 되었을까?

김진섭은 1903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경성 양정 고보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 호세이(法政)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귀국 후 광복 전까지는 주로 문학 및 연극운동에 참여 하였고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 및 수필가로서 활동하였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그는 그해에 북한군에 납북되어 사망일자도 모르는 저명인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독문학자이니 독일문학 작품에 관심이 컸을 것이고 그래서 안톤 슈낙의 작품에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그가 납북되기 전, 즉 1940년대에 번역된 작품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인(Main)강을 따라 동쪽으로 한 50Km 지점에 카알(Kahl am Main) 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이 곳 시립묘지에 안톤 슈낙이 잠들어 있다. 나는 오늘(2022년6월5일) 이 곳으로 안톤 슈낙을 방문하였다.

아득한 옛날, 학창시절에 그의 글귀들을 외우려고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가며 그의 비석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생각나는 구절이 하나 있다 ; “정원 한 편에서 발견 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세계문학작품에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남정호씨는 나에게 ‘안톤 슈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남정호 기자가 한국일보 프랑크푸르트 특파원이었던 1970년대 말에 당시 한국일보 파리 특파원이었던 김성우(金聖佑) 기자로부터 ‘안톤 슈낙’에 관한 공동취재의 부탁을 받고 그의 묘소를 찾아 카알(Kahl am Main)행을 같이 했다.

김성우 특파원은 당시 한국일보 독자들의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세계문학산책’ 시리즈의 작가였음으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의 뒷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무덤이 수백 개나 되는 큰 묘지여서 이들은 구역을 둘로 나누어서 그의 묘를 찾아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또 안톤 슈낙이 살던 집을 어렵사리 찾아 지금 사는 집주인에게 그에 관하여 문의를 하니 집주인은 “나는 모르는 사람” 이라며 어깨만 출석거리고 있었다.

남정호씨는 그날의 실패담을 이야기하면서 못내 아쉬워했었다.

연고자가 없는지 묘지는 묘지관리인이 겨우 청소만 해 놓은 정도이고 그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오랜 세월의 풍상(風霜)으로 글자들의 식별이 어려워져 가는 안톤 슈낙의 비석은 나를 슬프게 하였다.

1277호 17면, 2022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