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나폴리, 통영과 박경리 기념관

유한나 (재독시인, 수필가)

지난 3월 중순부터 약 3주에 걸쳐 한국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한국에 나오는 형부를 위해 여동생이 함께 자동차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였다. 이곳저곳 여행지를 의논하다가 독일에서 보기 어려운 바다를 보러 가자는 데 의견을 모았고, 박경리 작가(1926-2008)의 기념관이 있는 통영으로 목적지를 정하였다.

대구에 사는 친척 언니와 함께 떠나느라 대구에 들러 점심을 먹은 후 통영으로 떠났다. 저녁 시간이 가까운 17시 반경, 통영에 예약한 숙소에 도착하였다. 어둡기 전에 근처 활어 시장에 나갔다. 여동생이 직접 생선을 골라 몇 마리 생선회를 떠 오고 멍게와 해삼도 사서 숙소에 들어와 생선 매운탕까지 끓여서 풍성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숙소 가까이에 있는 한국 최고의 벽화 마을이라는 동피랑을 방문하였다. ‘동피랑’이라는 말은 ‘동쪽에 있는 벼랑’이라는 뜻이다. 산책하듯이 천천히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꼬불꼬불 뻗어가는 골목길마다 화가들이 담벼락에 그린 벽화가 정겨웠다. 주로 거북이나 문어, 고래 등 바닷속 풍경이나 다도해 섬 들을 아기자기하게 그려놓았다.

동화 속에 나오는 듯한 카페도 군데군데 있었는데 귀여운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빈 의자들이 언덕길을 올라가는 관광객들에게 앉아 쉬어가라고 부르는 듯하였다.

점심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식사하였다. 그곳에서 욕지도 등 섬으로 가는 배도 탈 수 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 다도해를 내려다보며 건너가는 통영 케이블카를 타기로 하였다. 이 케이블카는 1.975m로 한국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라고 하였다. 다섯 명이 케이블카를 타고 다도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약 10분 정도 맞은편으로 건너가니 미륵산 정상까지 등산하는 길이 있었다.

꼬불꼬불 계단 산길을 따라 등산하듯이 땀 흘리며 올라간 꼭대기에는 `미륵산 461m´라고 새겨진 돌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시원한 바람에 땀을 씻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크고 작은 섬들을 품고 있는 다도해 푸른 물결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해주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이 일어났던 바다라고 하였다. 역사적인 바다를 보는 감격스러운 시간이었다.

다음 코스로 박경리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경남 하동에 작가의 문학관이 있고 박경리 기념관은 추모 2주기에 맞추어 2010년에 작가의 고향인 통영에 세워졌다. 산자락이 둘러싸인 조용한 곳에 자리 잡은 기념관 입구에는 두 손으로 책을 펼쳐 든 채 한산도 바다를 향해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전신을 조각한 작은 동상이 있었다. 동상 앞에 서 있는 우리를 본 문화해설사가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며 동상과 기념관에 대하여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동상을 실물 크기보다 작은 1.4m 높이로 만든 이유는 작가의 겸손한 삶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동상이 세워진 검정 대리석 판 앞면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박경리 작가의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통영에 대해 쓰인 대목을 새긴 돌비석도 눈에 띄었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항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

전시관 안에는 작가 필생의 역작인 <<토지>> 친필 원고와 편지 등의 유품을 볼 수 있었고, 벽면에 작가의 일대기를 파노라마처럼 당시 사진들과 함께 꾸며놓았다. 또한 작가가 원주에서 집필하던 서재를 재현한 작은 방도 볼 수 있었다.

원주에 수감되었던 사위 김지하 시인을 돌보기 위해 1980년부터 원주에서 25년 넘게 사시다가 2007년 12월에 고향 통영을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작가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곳 양지농원을 마음에 무척 들어 하셔서 이 땅의 소유주였던 정창훈 변호사(1921-2012)가 박경리 기념관을 짓도록 땅을 내주었고, 이곳에 작가의 묘소도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기념관 밖에서 묘소가 있는 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구름이 한산도 바다를 내려다보며 한가롭게 떠 있었고 산자락이 아늑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묘소로 가는 길가에는 작가가 쓴 시 작품들을 그림과 함께 액자에 넣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놓았다. 우리는 박경리 작가를 대하소설 <<토지>>와 통영을 배경으로 쓴 <<김 약국의 딸들>> 등 소설을 쓴 작가로만 알고 있지만 <<못 떠나는 배>> (1988) <<도시의 고양이들>> (1990) <<자유>> (1994) <<우리들의 시간>> (2000) 등 시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견디기 어려울 때 시는 위안이었다. 8.15해방과 6.25 동란을 겪으면서 문학에 뜻을 둔 것도 아닌 평범한 여자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여 살아남았고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라고 첫 시집<<못 떠나는 배>>의 서문에 쓰고 있다.

선생님의 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고요히 자리 잡고 있었다. 6.25 때 남편과 사별하였고, 어린 외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참척의 아픔, 사위 김지하 시인이 감옥에 수년 동안 감금되는 등 시대의 아픔과 맞물려 개인적인 인생의 아픔과 고통을 겪은 선생님은 격랑의 시대 가운데 억울하고 기구한 인생을 오직 글로써 이겨냈던 사마천에 대하여 쓴 두 편의 시가 있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 긴 낮 긴 밤을 /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 글을 썼던 사람 / 육체를 거세당하고 / 인생을 거세 당하고 /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 박경리 시집 <<못 떠나는 배>> (1988)중 <사마천> 전문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 나를 지탱해 주었고 /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 박경리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2008) <옛날의 그 집> 중에서

궁형의 치욕 가운데서 <<사기>> 를 집필하였던 중국의 사마천을 생각하며 모든 견디기 힘든 고통과 외로움, 아픔을 오직 글로써 이겨내며 최참판댁 4대에 걸쳐 600여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토지>> 를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에 걸쳐 완성한 박경리 작가는 통영이 낳은, 아니 한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기념관을 나섰다.

기념관 벽에 붙어있던 작가의 말을 떠올린다.

“창조란 순수한 감정이 바탕입니다.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업입니다. 작은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슬픔을 사랑하세요. 슬픔을 사랑해야 합니다. 있는 대로 견디어야 합니다.”

“생각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또 배제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자주 마주 앉아보세요. 모든 창작은 생각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 통영 여행은 십여 년 만에 여동생 내외와 우리 부부가 다도해 바다색 같이 푸릇푸릇한 행복한 시간을 함께 나눈 탁월한 선택이었다.

1312호 28면, 2023년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