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구들이여!

홍 종 철

저는 오늘 친구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이 글을 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 저는 파란만장했던 저의 인생 여정을 한 번 뒤돌아보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참으로 행운아였습니다. 제가 인생에서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1966년 7월 31일 파독광부 제1차 7진중의 한 사람으로 독일 땅을 밟았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28살이었으니 인생의 3분의 2 이상을 독일에서 산 셈입니다.

1960년대의 독일(당시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눈부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전고용(Vollbeschǟftigung)을 실현했던 시기입니다. 산업계에 노동력이 부족하여 터-키, 스페인, 이태리, 유고슬라비아 등으로 부터 많은 인력을 수입하였으며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광부, 간호사들이 올 수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Gastarbeiter(손님노동자)시대가 열렸던 시기입니다.

제가 소속되었던 Aachen지방의 EBV 광업소에는 수천명의 독일인, 외국인 광부들이 일하고 있었고 한국인 광부들도 선진들을 포함하여 5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3년간을 지하에서 일했습니다.

광부는 참으로 위험한 직업입니다. 지하 1000m 이상까지 내려가서 석탄을 캐어 지상으로 끌어 올리는 작업인데 모든 기계 도구들이 유럽인 위주로 만들어져 있어서 체구가 작고 체력이 약한 한국인에게는 참으로 힘든 노동이었습니다.

발 한 번 잘 못 디디면, 몸 한 번 잘 못 움직이면 어떤 돌덩이가 와서 누를지 모릅니다. 어떤 쇳덩어리가 후려치고 갈지 모릅니다. 땀으로 범벅이가 된 얼굴은 새까만 탄가루로 화장이 되어 있어서 목욕을 하기 전에는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부상자도 많이 생겼습니다. 손가락을 잘리고, 발을 절단 당하고, 한 눈을 실명 당하고… 암석에 깔려 죽어 간 동료들도 여럿 생겼습니다.

저도 작업중 탄층에서 떨어지는 석탄 덩어리에 맞아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안톤 슈낙의 묘소를 방문한 필자

당시 우리 광업소의 한국인 통역은 조희영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학구파로서 통역을 하면서 아헨(Aachen)공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박사학위 취득을 위하여 본(Bonn)대학으로 가게 되니, 광산 인사과에서는 후임통역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 조희영님은 수백명의 한국인 광부들 중에서 저를 후임통역으로 추천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der, des, dem, den” 등 독일어 기초문법을 배운 덕분에 짧은 독일어로 나마 비교적 독일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서 광산 기숙사에서 통역이 없을 때 대리 통역을 하기도 했고 후진광부들이 왔을 때에는 교육통역으로 발탁되어 교육장에서 칠판 앞에 서는 독일어 선생노릇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주효하여 저는 저보다 먼저 온 선진 광부들도 많은데 이들을 다 제치고 주통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남보다 독일어 단어 하나라도 더 안다는 것이 이렇게 큰 힘이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통역은 넥타이 매고 사무실에서 펜대로 일하는 직이기 때문에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수많은 동료 광부들의 입과 귀의 역할을 해 주려니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밤중이라도 경찰서에 가서 통역을 해 줘야 했고 공상으로 실명된 동료를 데리고 산재보험(Berusgenossenschaft)에 찾아가 보상 담판을 하기도 했고 동료들이 지하에서 암석에 깔려 죽어갔을 때에는 사후수습을 하느라 무척 바쁘게 뛰어 다녔습니다. 서류 수속이나 여권 공증업무 등으로 Bonn 소재 한국대사관 출입도 자주해야 했습니다.

독일 목사님과 협의를 하여 많은 동료들의 눈물 속에 교회 영결식을 치르고 각종 수속을 거쳐 유해가 고국으로 봉송되기 까지 참으로 바쁘고 어려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연고자 없이 죽어간 동료들 때문에 저는 여러 번 호상 아닌 호상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통역인 것을 시기, 질투, 모함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통을 받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 친구는 측근들을 밤에 제 집에까지 보내 공갈, 협박을 하며 행패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것들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잘 대처하여 6년간의 광산 통역생활을 멋지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 간호사들은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파독되기 시작하여 Berlin, Köln, Düsseldorf, Mainz, Frankfurt 등 주로 대도시에 분산되어 일하고 있었는데, 우리 총각 광부들이 이 아가씨들을 조용히 놓아 둘 리가 없습니다. 이들은 주말만 되면 간호원촌(우리들은 당시 간호사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병원 기숙사를 그렇게 불렀습니다)을 짓궂게 찾아다니며 구애를 하였고 드디어 사랑이 열매를 맺어 결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광산 통역을 하면서 이들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봐 주었는데 독일인 하객들도 많이 참석하기 때문에 짧은 독일어로 나마 간간이 상황설명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한 때 저는 주말만 되면 무슨 직업 사회자라도 된 양 여기저기 불려 다녔습니다.

어떤 때는 같은 날에 결혼식이 겹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도 있었지요. Bonn, Frankfurt, Mainz, Dortmund 등에도 여러 번 가서 친구들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결혼식 뿐 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밤’‘광복절 행사’ ‘송년회’등 수많은 행사에서도 사회를 보았습니다. 박수도 많이 받았고 인기도 참 좋았습니다.

당시 한국인 광부들은 ‘한국인 광산근로자 임시 고용 협정’에 따라 3년간 독일의 광산기술을 습득한 연후 귀국한다는 조건으로 기한부 파독되었기 때문에 장기체류가 보장되어 있는 한국인 간호사와 결혼을 하면 가족동거권(Familienzusammenführung)을 향유할 수 있어서 3년 후 체류허가연장도 받고 다른 직장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부들은 갓 결혼한 간호사의 근무지 위주로 각 지역으로 흩어져 새 직장을 구하고 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광부들은 그야말로 ‘뽕도 따고 임도 본 행운아’들이었습니다. 독일 교민사회는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입니다.

1970년대는 파독 광부 ‧ 간호사들이 독일 전역에 약 만명 정도에 이르는 시기였습니다. 주독 한국 대사관에도 여자 노무관을 포함하여 7명의 노무관들이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사관 노무관실에서는 한 한국인 통역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수석노무관인 임정삼 국장은 수많은 광산 통역들 중에서 저를 발탁하였던 것입니다. 그동안 대사관 출입을 많이 하여 그들이 저를 알고, 교민사회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데다 또 많은 친구들이 추천한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9년(3년 지하노동, 6년 통역)간의 Aachen 생활을 끝내고 그 사이 결혼한 독일인 아내와 딸을 데리고 거주지를 Bonn으로 옮겼습니다. 저는 대사관 노무관실에서 1974년부터 1978년 까지 4년간 열심히 일했습니다. 대사관 근무 중에도 주말에 결혼식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하여 사회를 보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고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괴한의 피격으로 서거하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며칠후 프랑크푸르트 한인회에서는 육여사를 위한 교민 ‧ 신구교합동 추도식(Ökumenischer Gottesdienst)을 거행했는데, 저는 대사관 직원들과 같이 여기에 참석하여 사회를 보았습니다.

이 때 프랑크푸르트 외환은행 홍세표 지점장(후에 외환은행 총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홍세표님은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즉 서거한 육영수 여사가 그의 이모였습니다. 그는 이 추도식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사회를 보는 저를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보았던 모양입니다. 그 후 홍세표님은 자주 대사관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마다 노무관실에서 일하는 저를 찾아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저에게 “(주)대우는 전도가 양양한 대기업인데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대우 법인(Daewoo Handels GmbH)에 일단 대리급으로 부탁을 해 놓았다. 김우중 사장(당시)도 만나 당신을 잘 추천해 주겠다”며 직장을 옮길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이창희 대사님의 승낙도 이미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창희 대사님은 저를 위한 영문과 독일어로 된 최고급의 추천서(Zeugnis)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저는 1978년도부터 대우에 몸담게 되었습니다.

대우 프랑크푸르트 법인은 60명 정도의 직원 중에서 반은 법인장을 포함하여 한국에서 온 주재원들이고 나머지 반은 비서 등 독일 현지인들이어서 사실 독일어를 잘 하는 한국인 직원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독일 현지인들의 인사업무 담당으로 25년간 정년퇴직 시까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대우에서 일하는 동안 저는 상급자들로부터 많은 신임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우 프랑크푸르트 법인장이었던 김경수님, 석진철님, 최계용님 등의 저에 대한 신임과 총애는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김우중 회장님도 독일에 출장 오시면 제가 모실 때가 많았습니다. 회장님은 저에게 “열심히 일하라”는 격려와 함깨 제가 독일인과 결혼한 사실을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독일여자도 한국여자처럼 그렇게 잘 해 주느냐?” 라고 조크 질문도 하셨습니다. 저는 회장님의 격려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회사를 위하여 더욱 열정을 다하여 일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 많은 글을 신문에 발표하였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글뤽아우프회에 고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파독광부 ‧ 간호사에 대한 말, 말, 거짓말들”, “재독한인판 악의 탄생”등을 검색하면 제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저는 한 평생을 “깨끗하게 살자(청렴결백)”,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자조자립정신)”를 ‘인생의 모토’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사실 교민사회애서 특정인들과 다툼도 있었습니다.

노동부에서 관리하는 ‘파독광부 특별회계 적립금’(이하 적립금)이 한 예입니다. 이 적립금은 당시 미주 쪽으로 이주한 파독광부들의 몫이기 때문에 즉 주인이 있는 돈이기 때문에 재독 교민들에게는 지급 요구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교민단체들이 노동부에 대하여 이 적립금을 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부당하게 요구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사실관계를 설명하여 이들을 이해시키려 노력했고 나중에는 비판으로 맞서는 양상으로 까지 번지기도 했습니다. 저의 자존심과 양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자조자립정신에도 배치되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직장에서도 독일 현지인들이 자기들끼리만 Betriebsrat(경영협의회 : 일종의 회사노조)를 만들어서 각종 횡포를 부리는 것을 그냥 묵과할 수 없어서 이들을 상대로 노동법원(Arbeitsgericht)에 제소하여 수년에 걸친 쟁의 끝에 이를 무효화 시키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외에도 공사간에 수많은 법정투쟁을 하였으나 한 번도 패소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프랑크푸르트에 살면서 우리나라 체육계의 거성 손기정 선생님과 친분을 맺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이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손기정 선생의 청동투구

선생님은 1936년도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이기에 독일 체육계와는 각별한 관계에 있었고 그래서 독일 올림픽위원회(NOK)에도 자주 오셨습니다. 그런데 NOK가 마침 제가 일하는 대우와 같은 Frankfurt-Niederrad에 위치하고 있어서 선생님이 오실 때면 제가 통역으로서 비서로서 도와드릴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리스 청동 투구 반환 문제로 NOK와 접촉할 때에는 제가 이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결국 1986년에 Berlin에서 있었던 ‘베를린 올림픽 5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이 투구는 주인인 손기정 선생님의 품에 안기는 쾌거가 이루어졌습니다. 선생님은 수고의 표시로 저에게 이 청동투구의 복제품 하나를 보내 주셨는데 저는 이것을 지금까지 가보(家寶)로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와 저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졌던 분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차범근 선수입니다. 차범근 선수는 1979년부터 1983년 까지 독일 축구의 명문인 Eintracht Frankfurt에서 맹활약을 했었는데, 독일어를 못하고 독일 사정에 어두워서 제가 통역 및 보호자(Dolmetscher & Betreuer)로서 도와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독일 축구계의 유명 인사들과도 교류하고 신문에서도 자주 언급되며 TV에도 출연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국제도시인 Frankfurt에 사는 덕분에 저의 자식들도 큰 혜택을 받았습니다. 딸은 Lufthansa 에서 일하며 자기 인생을 잘 개척해 나가고 있고 아들도 헤센방송국(Hessischer Rundfunk)에서 인정받는 요원으로 일하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게 없습니다. 아들로부터 얻은 쌍둥이 손녀들의 재롱부리며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재미입니다.

두뇌작용에는 아무 지장이 없으나 류마티스, 고혈압 등으로 고생을 좀 하고 지냅니다. 아내가 처방약을 아침, 저녁으로 잘 챙겨 주어서, 저는 약을 주는 대로 먹기만 하면 됩니다. 저의 의사나 병원 방문일정도 다 아내가 조정해 줍니다. 아내는 결혼 후 50여년간 제가 가는 길을 마다 않고 따라온 충실한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젊은 시절 교민사회의 행사 때문에 그렇게 자주 집을 나가 돌아다녀도 불평없 이 일편단심 저 하나만을 믿고 여기까지 같이 와 준 아내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세계에서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 도덕과 품위가 있는 나라, 가장 잘 사는 나라 중의 하나, 연금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노후생활이 보장되어 있는 나라, 의료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환자들에게 큰 혜택을 베푸는 나라…. 이것이 독일입니다. 저는 이런 독일에서 제 인생의 대부분을 멋지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제 친구들 중에는 “뼈만은 그래도 고향 땅에 묻어야 하지 않겠나”하며 귀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소동파가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이라고 읊었듯이 인간이 뼈를 묻을 곳이야 이 세상 어디에도 다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미 유서에도 언급했습니다마는 유명을 달리하면 화장해서 재를 익명으로 어느 산간 나무 밑에 묻도록 가족에게 말해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장례식도 없고 무덤도 비석도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 여러분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정말 조용히 가려고 합니다.

친구 여러분! 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안녕…..◈

1352호 14면, 2024년 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