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베를린 (Oh my Berlin)

류 현옥

베를린을 제2고향으로 반백년을 같이 살아온 친구가 “오 마이 베를린”이라는 동영상을 카카오톡으로 보내왔다 . 콤멘타 없이 들어온 동영상의 제목이 자극을 주었지만 시간이 나면 열어본다고 미루었다

감당할수없이 넘치는 베를린에 대한 소설 ,영화와 연극 은 물론 유행가를 속에서 살아왔다. 이름난 세계의 유명예술인들이 몰려와 끊임없이 이시를 기리는 예술품창작에 열중하여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한국인이 “오 마이 베를린” 이라는 동영상을 만들어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 이색적이라고 생각 했지만 베를린 시에 60여년을 살은 나의 사진이 이동영상 내용에 한몫 거들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나는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보겠다고 미루다가 뜨거운 찻잔을 들고 .차를 음미하며 비디오 내용을 겉 헐기로 보겠다고 한 것이 차가 식어가는 줄도 잊은체 비디오 영상 에 집중했다

동영상 작가는 올해 65 세 한인 남자다 .

4막으로 형성된 비디오영화는 오십 여 년 전에 찍은 흑백사진으로 시작된다. 작가가 초등학교 5학년 때 2남1년의 어린 자식을 두고 독일로 돈벌려간 파독간호사 어머니이야기다.

60여 년 전 가난했던 우리나라 모습을 뒷배경으로 한, 먼 베를린으로 어머니를 떠나보낸 세 명의 어린아이들이 사진속의 주인공이다. 성인이 되어 이 흑백 사진을 해설하는 창작자의 애잔한 목소리에 담은 내용은 동시대를 살았던 나 자신의 이야기다. 어린자식을 두고 기혼의 간호사들이 돈벌이를 떠났던 대한민국 역사의 기록이다.

작가는 두 동생과 자신을 두고 떠난 당시의 어머니 나이인 자신의 딸을 데리고 베를린에 와서 어머니의 사진을 들고 다니며 젊은 어머니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사진에 담았다.

사진속의 어머니가 혼자 외롭게 섰던 고목을 찾아내어 그때의 어머니처럼 고목아래 선다. 그동안 더 굵어진 가지를 보며 그날의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며 콧등이 시큰해짐을 느낀다. 어머니의 사진에는 잎을 잃고 섰던 고목이 무성한 초록의 잎들을 달고 서있다.

반세기 전에 젊은 어머니가 섰던 그 자리에 자신을 세워 사진을 찍는다. 두고 온 어린자식들을 생각하며 외롭게 어머니가 섰던 나무는 반백년을 지키고 있다가 그를 맞은 것일까 ?

작가의 어머니는 34 살의 젊은 나이로 떠나 3년 노동계약서를 연장하여 6년 후 40살의 나이로 돌아왔다

작가는 어머니가 돌아온 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어린 두 동생의 이야기도 없고 젊은 아내를 먼 타국으로 돈벌이로 보낸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오직 어머니가 6년간 살다온 베를린에 대한 상상과 그리움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 추적한다.

어머니와 친했다는 H 여사는 귀국하지 않고 같은 해 두고 간 아들과 딸을 남편과 같이 독일로 이주시켜 산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6년 동안 기다린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고 세 아이를 친구 H여사처럼 독일로 데리고 갔다면 지금은 자신이 베를린에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어머니가 사는 곳 독일 베를린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면 조금쯤 보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와 닿는 그의 조용조용한 고백이 듣는 사람을 그의 마음속으로 끌려들어가 그때의 상황을 눈앞에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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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작가가 일 년을 착각하여 1969 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9월 말 지금은 폐쇄된 베를린 탬펠호프 비행장에 내린 한국간호사들은 미리 배치된 병원으로 나누어져갔다. 작가의 어머니 B여사와 친구 H여사를 포함한 20명이 버스에 살려 당시 는 시립병원 이었던 비어쇼브(Virchow ) 병원으로 운반되었다. 이 속에 나도 섞여 있었다.

20명의 간호사중 11 명이 기혼자였다 임신을 한 상태로 비행기를 탄 한사람의 기혼녀 외에는 모두 어린자식들을 젊은 남편과 함께 고국에 두고 왔다 . 6명의 자녀를 두고 온 최고 연장녀를 선두로, 4명의 아이를 두고 온 분이 두 명 그다음이 작가의 어머니와 같이 세 자녀를 두고 온 분이 세 명 서른 살이 되지 않은 기혼녀들이 아이들을 둘씩 두고 왔다.

나는 9명의 미혼 중 한사람으로 하루아침에 어머니를 보지 못하는 아이들 31 명을 지구의 반대쪽에 두고 온 젊은 어머니들과 함께 결핵병동의 지붕 밑 방에서 타국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크리스마스파티에 한복을 입고 춤을 같이 추었던 22 살의 나의 모습이 비디오 속에 담겨있어 기억의 창문을 열게 했다 .나는 중간에 귀향을 했다가 다시 독일로 돌아오는 파란만장으로 이 귀한 사진들을 길에서 잃어버렸다.

훗날 그 아이들 중, 절반이 어머니들의 힘으로 독일로 와서 독일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어 독일 이주민 3세들이 태어났다

작가는 오래 동안 어머니와 같이할 베를린 여행을 꿈꾸었다고 한다.

착가는 “90이 된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착한 어린아이가 되어 한국요양원에 계신다”라는 말로 어머니의 근황을 알린다.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던 어린아이들 중 한사람으로, 어른이 되어 이 귀중한 비디오 창작을 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며칠간 그때로 되돌아 갈수 있는 계기를 준데 뜨거운 감동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