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 한국가정에서 겪는 대표적 어려움은 자녀교육, 특히 성장기의 아이들의 언어문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교포신문사에서는 이를 위해 윤재원 박사의 논문 “ 다중 언어 시스템 속 우리의 아이들”을 매월 첫째 주에 연재한다. 전문적인 논문을 일반인들이 이해 할 수 있게 새로이 쉽게 풀어 연재를 해주시는 윤재원 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부모의 언어 정책 2 – 아이가 태어나서 세 살까지
나의 큰 아이는 2005년에 다른 모든 아이들 처럼 가정에 큰 기쁨을 선사하고 환영을 받으며 세상에 나왔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엄마에게는 한국어로 환영을 받고, 아빠에게는 독일어로 환영을 받았으며, 엄마와 아빠는 영어로 아이가 태어남의 기쁨을 서로 나눴다.
엄마 쪽 식구들을 만나면 한국어로, 아빠 쪽 식구들을 만나면 독일어를 접하게 되었고 또한 엄마 아빠 식구가 섞여 있거나 독일 사람이 아닌 외부인을 만나면 영어, 독일어, 한국어에 노출되는 환경에서 자라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 유치원에 가기 전까지 (혹은 타게스무터 등 탁아기관에 가기 전까지) 아이는 부모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부모 중 특히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부모의 말을 가장 많이 접하고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큰 아들 미햐엘이 태어났을 때 산후조리를 해 주시러 한국에서 미햐엘의 조부모님이 와주셨가. 그때에 미햐엘은 엄마와 조부모를 통하여 한국어에 가장 많이 노출되었고, 아빠를 볼 시간은 별로 없어서 (그 당시 남편은 아침 7시 30분쯤 출근하여 저녁 7시 30분경까지 거의 12시간을 일터에서 보냈고, 출장도 많았다) 주말에만 독일어에 노출되었었다.
그러다 보니 말을 트기 시작할 때 한국어부터 시작했고, 아빠와의 교류는 대부분 놀이를 하며 내는 소리 (자동차나 기차 소리 -Brumm, brumm, tüt, tüüüt…) 등의 의성어를 내는데 그쳤다. 즉 한국어에 더 많이 노출되었기에 독일어에 비해 한국어를 더 활발하게 사용하면서 영•유아기를 보냈다.
큰 아이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고 만삭이 가까워 오면서 큰아이를 보모 시설 (Tagesmutter)에 보내기 시작하였다-미천한 살림 실력에 연년생(年年生) 아가 둘을 혼자 보는 것이 버거울 것임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미햐엘이 처음 탁아 시설에 갔을 때 독일어로 발화할 수 있는 단어는 Mama, Papa, Danke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친구를 무척 좋아하던 녀석은 급속도로 독일어를 흡수하기 시작했고 배운 독일어를 집에서 혼자 놀 때도 쓰기 시작했다. 보모였던 안네 (Anne)도 내가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미햐엘은 앵무새(Papagei) 같아 자신의 발화도 친구의 발화도 계속 따라 한다며 미샤의 빠른 독일어 적응에 감탄했다. 심지어 프랑스 아가의 프랑스어도 따라 한다며 혀를 내둘렀다.
당시 그 말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었는데, 아이가 탁아 시설에 잘 적응하고 친구들도 잘 사귀고 독일어도 빨리 배운다니 좋았지만 동시에 이런 속도로 독일어가 늘어 가다가는 엄마 하고만 사용하는 한국어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만났던 교민 친구들 중에 한국말을 안정적으로 잘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영어만 사용하기를 원했었다. 우리 아이의 한국어 여정도 이 언저리에서 끝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생기기 시작했지만 일단 현실 적응이 중요한지라 만삭의 나를 혼자 있게 허락해 주고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아이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앞섰었다.
각기 다른 가정의 아이들의 영유아기 언어 발달 양상
독일에서 태어나 자란다 할지라도 부모가 모두 한국인일 경우 자녀들의 한국어 발달은 영•유아 시절에 일상생활을 하기에 무리 없이 발달한다. 특히 부모가 거의 독일어를 집에서 사용하지 않고 꾸준하게 한국어 사용만을 고집하면 학교 진학 전까지는 한국어가 무리 없이 자리 잡는다.
다만 부모 중에 독일어(사회어)가 유창한 사람이 있다면 사정이 좀 다를 수 있다. 유치원 가기 전까지는 한국어가 가정어이겠지만 그 후에 자녀들은 더 빨리 독일어를 흡수하게 된다. 지인 중 독일어가 유창한 한국 엄마가 있는데 초등학교 자녀와의 대화에서 엄마는 한국어를 사용하는데 아이들은 독일어로 답변한다. 이는 엄마가 자녀의 독일어를 무리 없이 이해하고 (혹은 자신도 배워가면서) 자녀의 독일어 사용에 제동을 걸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한독 가정의 자녀들은 집에서 부모가 어떤 언어를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자녀의 두 언어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한독 가정은 보통 아빠가 독일인이고 엄마가 한국인인 경우가 (아직까지는) 더 많은데 엄마와 아빠가 서로 독일어로 소통하는 경우, 아이들은 유치원 가기 전부터 이미 독일어에 노출되고, 유치원 (그리고 학교)에서까지 독일어를 접하면 게임은 끝이다. 독일어가 훨씬 편안한 언어가 되기 마련이고 한국어는 이해하는데 그친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부모가 주로 집에서 육아를 담당한다면 영 유아기까지 한국어 발달이 강세를 보이지만, 한국어 사용 부모와 독일어 사용 부모가 아이와 균등한 시간을 보낸다면 더 재미있게 놀아주고 아이와 대화가 많은 부모의 언어를 더 잘 발화한다 (아이의 균형 있는 대화를 위한 특별 전략은 다음 호에 자세히 게재하도록 하겠다).
우리 집의 예를 들면 나는 한국어를, 독일인 남편은 당연히 독일어를, 그리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영어, 한국어, 독일어를 모두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 집 식사 자리에 초대되는 손님들 중 이런 광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독일어, 한국어, 영어를 바꾸어 가며 거리낌 없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찬사를 보내거나, 이렇게 혼란스럽게 어떻게 사냐고 걱정하며 우리를 타박하기도 한다. 어쩌겠는가, 주어진 환경이 이러한데.
요즈음은 다언어 시대이기에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지만 불편을 초래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미안한 마음을 피할 수 없다 – 세 개의 언어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가족은 손님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안 쓰려 애써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손님이 대화에서 소외되기도 한다.
자녀를 균형 잡힌 이중 언어 사용자로 키우려면 어떤 언어 정책을 기획하고 실천해야 할까? 잘 알려진 전략으로 육아 서적에서 많이 소개되는 한 부모-한 언어 (OPOL : One Person, One Language Policy) 전략이 있다. 이 전략은 말 그대로 양쪽 부모가 각기 다른 나라 언어로 아이랑 소통하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독일 아빠는 독일어만을 구사하고 한국 엄마는 한국어만을 구사하는 것인데 대부분의 육아 서적은 이 OPOL 법칙을 따라야만 아이들이 정확하게 두 언어를 분리하고 두 언어에 모두 균형 있게 발달시킬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근래에 많은 이중 언어 학자들은 이 전략에 대해 비판하는데 무엇보다도 이 전략이 일상생활에서 실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이 왜 실천 불가능한가 하겠지만 독일에서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독일어 사용이 능숙하지 않다 하더라도 독일에서 살면서 독일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만을 구사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우리는 많은 독일어 단어들을 일상생활에서 한국어로 번역해서 쓰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교회를 가는데 반(Bahn) 타고 왔다,“ “하웁트반 호프(Hauptbahnhof)에서 만나자,“ “내일은 암트(Armt)에 갈 것이다“ 라든지 등… 이렇게 두 언어를 혼합해서 쓰는 것을 코드 스위칭 (code-switching)이라고 하고 우리처럼 독일에 살면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두 언어의 혼합은 상용 표현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놀랐던 것이, 육아를 한국에서 해본 적이 없으니 한국어 육아 용어들을 모르겠더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육아 용품들의 명칭들은 그대로 독일어로 배우고 사용했다. 기저귀는 Windel이고, 이유식은 Hipp이고, 공갈젖꼭지는 Schnuller이고 기저귀 정리함은 Wickelkommode이고 … 육아를 독일에서 시작하고 배우다 보니 이런 단어들을 한국어로 말하려면 한참을 생각해야 하거나 인터넷에서 찾아봐야 했다.
이렇게 코드 스위칭이 일상적이 되고 애써서 분리하고자 하지 않으면 언어가 분리되지 않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순수하게 한국어만 쓴다는 것이, 즉 독일에서 사용하는 모든 단어를 한국어로 변환해서 쓴다는 것이, 동시통역하면서 사는 삶과 같았다. 이 상황을 생각하면 왜 한 부모 한 언어 (OPOL) 전략은 현실적이지 않은지 답이 나온다. 아가들은 자연스럽게 부모의 언어 혼용에 노출되고, 아이들 또한 언어를 혼용해서 쓰게 된다.
1990년대부터 균형 있는 이중언어 발달을 위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결과에 따르면, 가장 이상적인 부모의 언어 전략은 부모 중 한 사람이, 특히 아이와 더 잘 놀아주는 (시간의 양뿐만 아닌 아이와 더 질 높은 놀이 시간을 창출하는) 부모가 사회 통용 언어가 아닌 소수 언어 (minority language)를 사용할 때 자녀의 이중언어 발달이 가장 균형 있게 발전한다고 한다. 즉 한독가정의 경우 독일인 아빠가 가정에서 한국어를 사용할 때이다.
나의 대학 동료는 이 모범 사례를 실천하고 있는데 독일인 아빠인 그는 집에서 한국어를 사용한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유창한 한국어로 가족과 소통한다. 코로나 때문에 학과 회의를 화상으로 하다 보니 그 집안의 언어 사용을 직접 엿볼 수 있었는데 구수하고 유창한 경상도 사투리로 아이들과 아내와 대화하는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고 부러움이 솟구친다.
물론 우리는 아직까지 한국어가 유창한 독일 사람(외국인들)은 티브이 에서나 볼 수 있고 이러한 상황은 현실적이지 않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독일인 아빠가 몇 명이나 되겠나. (혹시 그러한 독일 분이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깊은 사과 말씀을 올린다.)
이러한 가정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사회어는 독일어, 가정어는 한국어에 대한 분리가 잘 되는 것은 물론이고 더 중요한 것은 양 부모가 모두 무리 없이 독일어 한국어를 교차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기 때문에 두 개의 언어를 자유스럽게 사용하는 것을 “세상의 상식 (세상 사람 모두가 이렇게 살겠구나)”이라고 생각하고 무리 없이 이중언어 사용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긴장해서 살면서 매일 녹초가 되는 외국 생활에서 우리 모두가 이상적인 조건과 상황에서 자녀를 키울 수 없다. 양쪽 부모 모두가 항상 두 개의 언어를 할 수도 없다.
나의 독일어도 엉성하기 짝이 없어 내가 독일어로 말할 때마다 장성한 아이들은 신나서 지적질을 시작한다. 어쩔 때는 남편이랑 한 편이 되어 신나게 나를 공격할 때도 있다. (남편은 대부분 점잖게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라 하지만, 나랑 말싸움에서 유리한 고지에 있지 않은 경우 치사하게 아이들과 함께 나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으면 당당하게 독일어를 사용하고, 지적질이 날아올 때마다 때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때로는 같이 농담으로 넘기거나, 때로는 아이처럼 신경질을 내면서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수렴한다.
결국 이중•다중언어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자녀의 균형 있는 다언어 개발을 촉발시키는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즉 부모가 자신의 부족한 독일어에 대한 열등감을 아이 앞에서 심하게 표출하지 않으면서 이중언어(와 이중문화)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독일어를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아이와 함께 언어를 배워가면 금상첨화이다. 이렇게 하면 아이는 이중언어 사용을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더 나은 이중언어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부모를 롤 모델로 삼는다.
아이에게 이중언어 사용을 강요하거나, 네가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어를 할 수 있어야지 등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행위는 아이가 어렸을 때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 있으나 취학 시점부터는 역효과가 난다. 다중언어 사용에 대하여 열린사고방식을 아이와 함께 나누는 것이 이 긴 여정의 건강한 출발선이다.
<기고자 소개>
• 현 독일 루르 보훔대학교 한국학 강사, 쾰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사회 언어학 및 어린이 다중언어 발달 교육 강사
• 기업 이문화 컨설턴트 (Interkuturelle Beratung, Cross-cultural consultant)
• 독일 쾰른대학교, 다중언어 어린이 한국어 습득에 관한 연구로 언어학 박사
• 미국 메릴랜드주립대 (UMBC) 언어문화교육 석사
• 현 11학년과 10학년 자녀의 엄마
1233호 14면, 2021년 9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