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원박사의 “다중언어 시스템 속 우리의 아이들” 8

독일 속 한국가정에서 겪는 대표적 어려움은 자녀교육, 특히 성장기의 아이들의 언어문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교포신문사에서는 이를 위해 윤재원 박사의 논문 “ 다중 언어 시스템 속 우리의 아이들”을 매월 첫째 주에 연재한다. 전문적인 논문을 일반인들이 이해 할 수 있게 새로이 쉽게 풀어 연재를 해주시는 윤재원 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청소년기 다중 정체성 확립의 시기

한국어로도 번역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석천 미디어 2001)는 아스트리드 트롯찌 (Astrid Trotzig)라는 스웨덴 작가의 책이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스웨덴으로 입양되어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자신을 버린 친부모에 대한 증오와 그리움, 출생과 외모에 대한 의문들을 풀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기 위해 모국 방문을 한 경험을 그려냈다.

소설가 김연수 씨와의 대화에서 그녀는 왜 한국 사람들은 자신을 한국작가로 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김연수 산문집, 여행할 권리, p206).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생물학적 부모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스웨덴에서 평생을 자라나고 스웨덴 부모에 의해 스웨덴의 시스템에서 자란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정체성이란 쉽게 말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자신의 내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자기 인정과 확신감 등을 포함하는 자기의식이다. 그러기에 이 인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역동적으로 바뀌어 간다. 즉 정체성은 과정이지 결과물이 아니다.

이중언어자나 다중언어자에게는 이 개념이 더 복잡해지는데 다중언어 청소년의 경우 여러 가지 다른 정체성을 개발해 나간다.

예를 들어 한독 가정에서 태어난 피터 한이라는 청소년에 대해 생각해 보자.

피터는 독일 사회를 살아가는 한 청년으로서, 학생으로서, 한 가족의 아들로서 각각의 상황에 독일어를 사용하기도, 한국어를 사용하기도 해가며 한국과 독일이라는 다른 문화를 넘나들며 살고 있다. 피터에게 이 두 언어와 두 문화의 접촉은 더 많은 가능한 자아를 발견해 내고 발전해 나갈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상충하는 자아 사이에서 혼란스럽고 안정되지 않아 불편하고 힘들어할 수도 있다. 나는 한국인인가 독일인인가의 사이에서 방황하며 두 언어와 두 문화 사이에서 자신만의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과, 또한 타인과 끊임없이 협상을 해 나가야 한다.

자아 정체성은 타고난 것과 살아가는 동안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 인성적 특성의 집합체인데 본인이 생각하는 자아와 남이 나를 판단하는 자아 사이에 간극이 크면 문제가 된다.

삽화 : 노민선 작가

예를 들어 독일에서 나고 독일에서 자란 한국가정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달라 보이고 싶지 않고 독일 사람이기를 원하는데 주변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들이 계속해서 한국인 혹은 아시아인이라고 콕 집어 부르거나 수업 시간에 아시아에 대해서 배울 때마다 원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그 아이에게 질문을 하며 관심을 준다고 가정해 보자.

학생이 한국, 아시아 뿌리를 가지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 다면 수업 시간에 그런 일이 생기면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인 정체성을 더 발전시키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자신은 다른 친구들과 같이 독일인이고 싶은데 한국인이라고 자꾸 정체성을 강요당하면 건강하지 못한 한국인 자아를 갖게 되거나 한국인으로서의 자아를 아예 부정해 버리게 된다.

2018년 월드컵 조별 예선 한독전을 이웃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 같이 시청했다. 이웃집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한테 “너희는 좋겠다 어느 팀이 이겨도 이긴 거니까”하면서 기분 좋게 해 주었다. 당초 예상은 “월드컵 우승만 4번을 차지한 독일이 큰 차이로 한국을 대패 시킬 것이다”였다. 나는 수십 명의 독일 이웃들을 손님으로 불러 놓고 한국을 대놓고 응원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제발 점수 차이 너무 크게 나게 지지만 말아라. 한국이 지면 속상하지만 독일팀이 이겨야 내 생활이 편안하니까… ”하며 비겁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최약체로 예상되었던 대한민국 축구팀은 그날 2대 0으로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대한민국에 그리고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커다란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웃사람들은 먼저 우리 아이들과 나에게 축하를 해주고 한국 팀에 기막히게 한방 당한 것에 대해서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웃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여주니 일단 우리 아이들은 기뻐했지만 동시에 실망도 컸을 것이다. 함께 응원하던 독일팀이 졌기에.

그래도 배웠으리라. 독일인임만을 고집했으면 참패에 함께 부들부들 떨었어야 했겠으나, 한국인이었으니 매우 특별하게 기뻤음을. 나의 비겁한 마음은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선물을 받고 더 미안해졌다. 저들 앞에서 우리 대표팀을 좀 대차게 응원할 것을… 이렇게 정체성의 발전은 타인의 반응 및 행동에 의해서도 커다란 영향을 받고 청소년기에는 이러한 타인의 반응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대부분의 한독 가정의 자녀들은 한국에서는 독일 사람으로 취급받고 독일에서는 한국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무엇인가를 관찰할 때에 사람의 눈은 자고로 자신과 비슷한 것보다는 다른 것 (즉 두드러진 것)에 집중하게 되어 있다.

한국 사람들은 피부색도 더 희고 혹은 눈 색이 까맣지 않은 다른 점에 집중하여 한독 가정의 아이들을 독일인으로 간주한고 같은 맥락으로 독일 사람들은 한독가정 자녀들이 독일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동양적으로 생겨 보이기에 이 아이들은 독일인이 “아니고” 한국, 아시아인이라 생각한다. 그럼 이 아이들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누구인가.

삽화 : 노민선 작가

아이들의 이중 정체성이 갈등과 소외를 유발하지 않고 협력과 상생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는 두 문화 모두에서 이 아이들에 대한 올곧은 이해가 필요하다. 즉 독일에만 한국인을 자국민으로 수용하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대한 한국 역시 이들을 개방적으로 포용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 한국 측에서도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재독 한인을 경계에 선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고 민족주의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럼 이렇게 다중 정체성을 가지는 청소년기에 건강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모로서 사회의 어른으로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로 아이들에게 다중 언어자로서의 정체성, 다중 문화 정체성, 이중 국적자로서의 정체성 (만약 두 개의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면), 이중 인종자로서의 정체성(한독 가정 자녀의 경우), 그리고 소속된 지역민으로서의 정체성 (프랑크푸르트 주민, 베를린 주민 등), 국제시민으로서의 정체성 등 다양한 정체성을 자유롭게 탐색해 나가는 것을 적극 지지해 주어야 한다. 그 길에 여러 가지 난관이 있을지라도 (예를 들어 한때는 한국인이기를 거부한다든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고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탐색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된다. 너는 엄마 딸이니까 당연히 한국 사람인 거라는 이론은 이제 다 큰 청소년들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둘째, 건강한 정체성 함양을 위해서 긍정적인 경험을 많이 만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어린 자녀라면 지역 사회에서 개최하는 한국 관련 혹은 아시아 관련 행사에 참가하거나 구경 가서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돕는다든지, 자녀가 이미 청소년이라면 아시아 관련 모임이나 한글학교, 교회 및 여러 가지 한국 행사에서 기쁘고 보람있는 자랑스러운 일들을 스스로 기획하고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일을 들 수 있겠다. 특히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한국 행사 기획이나 참여는 한국 및 독일인으로서 균형 잡힌 이중 정체성 발달을 위해 가장 효과인 매개체라 하겠다.

셋째, 이미 여러 연구에서 아이가 사회어만 사용하는 것보다 계승어를 함께 구사하는 것이 정체성 형성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이의 이중 혹은 다중언어 사용 능력이 문화 적응 유연성과 문화 정체감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즉 재독 한국인 아이들의 경우 한국어 구사 능력이 높을수록 독일 문화 정체감도 높다는 것이다. 이중 문화 가정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제하고 독일어와 독일문화에만 동화되어 생활하는 것보다 한국 문화와 언어를 잘 배우면서 독일 문화와 융합하여 사는 것이 훨씬 더 아이의 독일 문화 적응이나 이중 정체감 형성에 긍정적이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삽화 : 노민선 작가

마지막으로 정체성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님을 부모도 아이도 알고 있어야 한다. 한인 후손들에게 한민족 정체성을 심어주려고 다양한 지원이나 문화 프로그램을 펼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과 독일의 정체성이 만나 형성하는 그들만의 새로운 정체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즉 이 아이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한국인이면 이러이러 해야 한다는 한국화만을 고집하는 접근은 또 다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어디서 들었는지, 자신은 한국인 반, 독일인 반이라는 표현을 하면 야단친다. 물론 상용되는 표현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반, 반이라는 개념이 가당키나 한가. 이것은 과거에 순혈주의를 잘못 표방하던 잘못된 습관에서 나온 표현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독일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이지 반은 독일이이고 반은 한국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간절하게 EU 회원국 사람들처럼 재외 국민이 독일 여권도 한국여권도 당당하게 함께 소지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건강한 다중 정체성을 가진 우리 아이들이 한국인임과 독일인임을 함께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열린 사회를 만드는데 모두가 힘써야 한다.


<기고자 소개>

• 현 독일 루르 보훔대학교 한국학 강사, 쾰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사회 언어학 및 어린이 다중언어 발달 교육 강사

• 기업 이문화 컨설턴트 (Interkuturelle Beratung, Cross-cultural consultant)

• 독일 쾰른대학교, 다중언어 어린이 한국어 습득에 관한 연구로 언어학 박사

• 미국 메릴랜드주립대 (UMBC) 언어문화교육 석사

• 현 11학년과 10학년 자녀의 엄마

1253호 20면, 2022년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