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120년 전 탄생한 최초의 공식국가 “대한제국 애국가”(4, 마지막회)

1902년 1월 27일 자 대한제국 관보에 “대한제국 애국가”가 실렸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한제국은 이를 애국가로 공식 지정하고, 이어 악보를 인쇄하여 50여 개국에 선포, 발송하였다.

올해는 우리나리 최초의 애국가 “대한제국 애국가” 공식 지정 120년 되는 해로, 주독한국문화원은 7월 1일, 7월 2일 양일간 베를린과 할레(Halle)에서 “120년만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기념음악회를 개최한다.

교포신문사에서는 기념음악회를 앞두고, “대한제국 애국가”의 탄생과정과 작곡가 프란츠 폰 에커트(Franz von Eckert, 1852~1916), 그리고 그가 한국 음악에 끼진 영향 등을 4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주


(지난호에서 이어집니다.)

일제강점기 금지곡이었던 대한제국 애국가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독립군들이 이 노래를 불렀는가 하면 한일병합조약 이전에 하와이로 이민 갔던 조선인들이 멜로디를 기억하고 가사를 바꾸어 불렀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한미클럽에서 새롭게 작성한 악보에는 가사가

상제는 우리나라를 도우소서

영원무궁토록

나라 태평하고 인민은 안락하야

위권이 세상에 떨치여

독립자유부강을

일신케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나라를 도우소서

로 되어있다.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 아래서 숨죽여 지켜낸 노래, 만주 벌판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국을 그리며, 독립을 염원하며 불렀을 노래. 대한제국의 운명처럼 암울하고 애잔한 느낌이 든다. 이 노래를 통해 조선인들은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민족혼을 지켜나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대한제국 애국가는 충분히 기억할 가치가 있다.

대한제국 애국가가 널리 보급된 못한 이유

그런데 대한제국의 애국가는 정부의 지시와 의도대로 크게 확산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내용으로 보면 첫째로 가사가 한문투로 되어 있어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대한매일신보(1908. 7. 10)』는 한문투의 가사가 노래 부르기 어려우니 쉽게 개량해줄것을 제안하였다.

둘째로는 곡조가 부르기 어려웠다. 이는 우리의 전통 음악인 아악의 영향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전통 민요의 영향 때문이었다. 요컨대 에케르트가 헐버트H. B. Hulbert가 채록했던 ‘바람이 분다(Korean Vocal Music, The Kprean Repository, February 1896)’라는 민요를 참고하면서 한국의 전통 민요가락을 서양음악으로 전이하는 과도기적 요소를 담고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 외부적 요인으로는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애국창가’를‘불량창가’로 간주하고 부르지 못하게 단속하였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모든 애국가류의 소개를 일체 금하였다. 더구나 일제는 한국인들이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통해 국권회복과 독립을 꿈꿀 수 있다고 우려하고 금지곡으로 엄격히 단속하였다.

이처럼 가사나 곡조에서 부르기 어려웠던 점, 일제의 금지곡 조치 등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의 보급과 확산을 막았다.

그런데 이런 제 요인보다 더 어렵게 만든 것은 시세의 변화였다. 국가보다 황제의 안위와 복록만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전근대적인 가사 내용은 일제강점기 시기 독립운동으로 국민주권의 근대적인 민주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에커트와 황실군악대가 한국 움악에 끼친 영향

1901년 설립된 황실군악대는 1907 년 군대해산으로 인해 함께 이왕직양악대로 명칭이 바뀔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조선의 음악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황실군악대의 연주 기록을 보면, 고종의 만수성절, 계천기원절(양력 10 월 12 일), 황태자 천추경절(음력 2 월 8 일), 국가간의 조약체결, 각국공사와 영사를 비롯한 외국인의 영접, 러일전쟁 전승기념식, 장춘단 제향 등의 여러 행사에서 연주를 하였다. 이러한 연주를 통해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음향을 접할 수 있는 경험을 안겨주었다.

민간에로의 서양음악 보다 직접적인 보급은, 군악대가 1902 년 6 월, 파고다 공원 근처로 군악대의 관사를 옮기면서부터 시작된다. 에케르트는 군악대원의 합주훈련을 겸한 시민음악회를 매주 목요일 팔각정에서 개최하였다. 이러한 연주회는 일반인으로 하여금 서양음악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양악대가 연주한 곡들은 서곡, 왈츠, 모음곡, 가곡, 행진곡, 각국의 국가등 다양했다.

군악대 해산 후에 군악대 대원이었던 이들에 의해 학교의 음악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이시기 양악대의 연주곡목은 그 이후의 한국의 양악 특히, 기악의 기본 레퍼토리로서 작용하였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또한 군악대는 서양 악기의 유입에 있어서도 주요한 역할을 한다. 에커트는 조선에 입국 시 52 점의 악기와 악보를 가지고 왔는데, 이 악기들은 목관, 금관, 타악기 등 이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관악기들이 에커트 입국당시 이미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 악기들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에커트가 군악대를 지도하면서부터 비로소 사용되어 진 것으로 보인다.

1907 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면서 시위연대내의 군악대도 규모가 촉소되고 장례원 소속의 ‘제실군악대’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당시 계속되는 예산 삭감 등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파고다 공원에서의 시민음악회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1910 년 한일합병 이후 ‘이왕직악대’ 에 편성되어지면서 ‘아악대’와 구별하기 위해서 ‘양악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다. 그러다가 악대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조달이 점점 더 어려워짐에 따라 1915 년 악대는 해산을 하게 된다. 5 년 후인 1920 년 경성악대라는 민간악대로 다시 결성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0 년에 이르러 완전히 해체되게 된다.

해체 후 양악대의 양악대원 중 20 여명은 학교로 들어가서 음악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1930 년 해산된 경성악대로부터 72 점의 악기를 기증 받은 휘문고보에서 학교악대가 창설되었으며, 양악대원이었던 백우용, 김창희, 강흥준 등이 이 악대를 지도하게 된다. 휘문고보의 악대에 이어 배제, 경신, 중동, 중앙 등 5 개 학교의 연합악대가 창설되었고, 1931 년에는 연희전문학교의 악대가 창설되어 활동하였다. 이렇듯 양악대는 해체 후에도 학교 악대운동의 중심에서 한국의 악대문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한국인 최초의 군악대장이었던 백우용은 양악대장 시절 여러 편의 창가를 작곡했다. 1922 년 경에 출판된 『(조선지리)경개창가』에 수록된 38 편의 창가는 백우용이 작곡한 것이다. 이외에도 1928 년 이왕직아악부로 파견되어 궁중의 아악을 오선보로 채보 하였다.

플룻 주자였던 정사인은 송도 고등보통학교에서 학교 악대를 결성하여 음악교사 겸 악대지휘를 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정사인도 여러 편의 창가를 작곡하였다. 행진곡 ‘추풍’ ‘돌진’ , 민요 ‘닐리리야’ 그리고 가곡 ‘타향’등이 그것이다. 특히 추색은 “내 고향을 이별하고”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일제시대에 가장 많이 불려지던 노래중에 하나이다.

이렇듯 소위 양악 1 세대라 일컫는 백우용, 정사인등도 모두 양악대 출신들이었다. 이처럼 군악대는 영향력은 악대의 해체 후에도 한국의 양악문화의 전반에 미치고 있었다.

황실군악대는 한국에 있어서 최초의 서양악대였으며, 이 땅에 서양음악, 특히, 기악음악을 보급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황실군악대를 통해 대량의 서양악기들이 한국에 도입되었으며 이러한 악기들로 인해 악대문화가 활성화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군악대가 배출한 인물들은 양악 1 세대로서 한국의 서양음악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양악대가 한국의 서양음악의 수용과 발전에 있어서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에커트와 그의 후손들도 한국과의 인연 이어가다

에케르트는 군악대가 없어진 후에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개인 자격으로 음악을 지도하는 등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1916년 8월 6일 64세를 일기로 서울시 중구 회현동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조선에 묻히고 싶다는 생전의 희망대로 에케르트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에케르트는 구한말 설립된 법어(프랑스어)학교와 한성외국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프랑스인 에밀 마르텔을 1905년 사위로 맞았다. 마르텔은 1911년 한성외국어학교가 폐교되자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다. 1920년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제대에서 프랑스어 교수로 봉직했다. 일제강점기 말 서양인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진 가운데 1942년 강제 추방되어 중국 톈진으로 갔다가 해방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49년 세상을 떠나 그 역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마르텔의 딸, 즉 에케르트의 외손녀 한 명은 수녀가 됐다. 이마쿨라타 마르텔 수녀는 해방 전 원산에서 헌신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고생하다가 서독으로 송환됐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에서 봉사하다가 1988년 세상을 떠났다. 에케르트 가문은 3대에 걸쳐 한국과 일생을 함께한 셈이다.

이렇듯 1902년 2월 19일 고종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프란츠 에케르트와 그 후손 3대는 이 땅에서 일어난 비극과 희극, 그리고 굴곡진 역사의 마디마디를 체험하고 에커트의 애국가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끝)

1272호 14면, 2022년 6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