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120년 전 탄생한 최초의 공식국가 “대한제국 애국가”(3)

1902년 1월 27일 자 대한제국 관보에 “대한제국 애국가”가 실렸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한제국은 이를 애국가로 공식 지정하고, 이어 악보를 인쇄하여 50여 개국에 선포, 발송하였다.

올해는 우리나리 최초의 애국가 “대한제국 애국가” 공식 지정 120년 되는 해로, 주독한국문화원은 7월 1일, 7월 2일 양일간 베를린과 할레(Halle)에서 “120년만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기념음악회를 개최한다.

교포신문사에서는 기념음악회를 앞두고, “대한제국 애국가”의 탄생과정과 작곡가 프란츠 폰 에커트(Franz von Eckert, 1852~1916), 그리고 그가 한국 음악에 끼진 영향 등을 4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주

(지난호에서 이어집니다.)

일제가 해산한 비운의 대한제국 군악대

1904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에,

“학부(學部)에서 각 학교 애국가를 정리하기 위하여 각 학교에 신칙(申飭)하되, 군악대(軍樂隊)에서 조음(調音)한 국가를 효방(效倣)하여 학도를 교수하라 하난대, 그 국가는 여좌(如左)하니,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皇帝)를 도으소서/

성수무강(聖壽無疆)하샤 /

해옥주(海屋籌)를 산(山)갓치 사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寰瀛)에 덜치샤/

오천만세(敖千萬歲)에 복록(福祿)이/

무궁(無窮)케 하소셔/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皇帝)를 도으소셔.”

민영환은 사직(社稷)을 보호하고 국가를 강건하게 하기 위하여 군악대 창설을 주도 했다. 그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서 군악대를 보고 크게 느껴 군악대 창설을 서둘렀다. 그에게 군악대는는 충성심을 높이는 수단이었고 조국수호의 한 방법이었다.

1900, 조선 군악대 탄생

1896년 5월 20일 민영환 당시 조선국 전권대사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 때 러시아 군악대를 본 민영환은 조선에도 이를 만들어 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민영환은 고종에게 “러시아 군악대와 같은 것을 조선에도 만들어야 한다”고 간청해 허락을 받았다. 군악대는 1900년 12월 19일 칙령 제59호로 설치됐다.

당시 군악대는 시위연대와 시위기병대에 각각 2개대로 편성됐다. 1902년 편성된 군악대는 1등 군악장(대장) 1명, 2등 군악장(부장·하사급) 1명, 1등 군악수 (악사·부하사관) 3명, 2등 군악수(상등병) 6명, 악사 27명, 악공(연주자) 12명, 서기 1명 등 총 51명으로 구성됐다.

1901년 2월 1일, 고종은 군악대 발전을 위해 독일인 에커트(Franz Von Eckert) 를 시위군악대 교사로 3년간 고용했다. 에케르트는 1902년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는데, 일제는 1910년 이 노래를 금지했지만,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이를 애국가로 불렀다.

동양의 제일로 영국·미국에 뒤지지 않았던 군악대

군악대는 창설된 후 황실의 각종 행사에 불려다녔다. 당시 서양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군악대는 조약을 체결할 때나 나라의 큰 행사 가 열릴 때 연주했다. 1902년 7월 15일 저녁 7시쯤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맺은 정말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군악대는 기념 연주를 했다.

또한 국가행사인 계천기원절(대한제국 창건 기념일, 양력 10월 12일), 만수성절 (고종 황제생일, 음력 7월 25일), 황태자 천추경절(생일기념일, 음력 2월 8일) 등에서 축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군악대는 1903년 5월 신임 일본공사 초청 공연, 1905년 5월 26일 비원에서 외국인들을 접대하기 위한 원유회 때 연주했으며, 1907년 10월 러시아인과 미국 육군장교 등이 방문했을 때 양국의 국가를 연주하기도 했다.

군악대의 당시 연주에 대한 평가는 <동아일보(1924년 3월 4일)>에 게재된 내용을 보면 알수 있다. 이 신문은 <런던타임스>에서 “조선의 군악대는 설립한 지 불과 몇 해 되지 아니 하였으나 그 기술은 영국의 빅토리아 악대나 미국의 수사악대보다 못하지 아니하다”고 호평한 내용을 소개했다.

또한 러일전쟁 직전의 어느 날 궁중에서 연회가 열렸을 때, 일본대리공사 하야시는 러시아의 바울 공사에게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을 비교했을 때 누가 음악의 천재 기질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한참 생각하던 바울 공사는 “조선 사람은 동양의 제일 이라 일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는 일본과 러시아의 불편한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제국 군악대의 실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나온 답변으로 보인다.

초기 군악대를 이끈 김학수와 백우용

김학수는 대한제국 군대 창설시 시위연대 참위(위관급)였으며, 1902년 5월 16일 군악대 1등 군악장으로 임명됐다. 또한 1906년 군악대 경비 문제에서 잘못을 범해 15일 동안 근신할 때까지 군악대를 이끌었다.

반면 백우용은 1902년 육군 보병 참위로 군악대 3등 군악장으로 임명됐다.

김학수가 물러나면서 백우용은 1907년 3월 10일 군악대 1등 군악대장으로 승진했다.

특히 1905년 10월 14일 두 사람은 일본에게 훈5등서보장을 받았다.

군대 해산 뒤 이어진 망국의 운명

‘동양 제일의 군악대’는 일제의 손에 해산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군대마저 해산했다.

1907년 8월 1일, 친일파 군부대신 이병무(조선 귀족)는 전날 밤 받은 일제의 군대해산 명령에 따라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식을 열었다. 이에 따라 군악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군악대의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07년 9월 1일, 친일파 이완용은 군대 해산으로 사라진 군악대를 황실 음악대로 변모시킨 것이다. 벡우용과 장교 2명, 악사 101명도 궁내부 장례원에 편입됐는데, 백우용은 악사장으로 임명됐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국권을 강제로 빼앗으면서, 장례원 소속 음악대는 이왕직 악대로 부속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악대는 1919년 3월 사망한 고종황제와 운명을 함께했다. 고종이 사망한 해 9월, 이왕직 악대는 해산됐다.

해산된 후 장례원 악대로, 다시 이왕직 악대로 이어져온 군악대는 경성악대로 재탄생했다. 대한제국 때 마지막 군악대장이던 백우용은 이왕직 악대의 악사 27명과 함께 경성악대를 조직해 1919년 11월 20일 종로청년회관에서 제1회 연주회를 개최했다.

경성악대는 이왕직에서 매년 3천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그밖에도 만주철도회사와 조선총독부·조선은행·식산은행 등에서 보조금을 받아 운영비로 충당했다. 경성악대 는 그 힘으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 악대 사무실을 마련해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경성악대는 1920년 6월 1일부터 경성호텔과 탑골공원에서 시민을 위한 연주회를 매주 개최했으며 원산·사리원·대구 등에서 순회공연을 펼쳤다.

경성악대가 군악대 뒤를 이었으나

하지만 1921년 이후 경성악대는 재정난으로 해산될 운명에 놓였다. 악사들의 생활비와 순회공연 연주비를 충당하는 것도 어렵게 됐다. 악대장 백우용은 “우리 악대가 장차 해산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조선 양악의 원조가 되는 이상에는 그 운명을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한편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그 기술 을 가르쳐 주고 싶다”고 아쉬워했다.

백우용은 경성악대의 부흥을 위해 경성에 있는 4개 권번(기생)조합과 함께 연주회를 개최하거나 후원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백우용의 노력으로 1924년 3월 3일 경성악대 후원회가 결성됐으나, <동아일보> 후원으로 연주회를 몇 번 개최하는 정도였다.

1927년 <동아일보> 사옥 신축 기념 연주회를 끝으로 경성악대는 1930년 이후 신문지상에서도 사라졌다.

이처럼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악기를 연주한 군악대, ‘동양 제일의 악대’라는 명성을 얻은 대한제국의 군악대는 나라의 운명에 따라 해산되는 아픔과 제국주의 전쟁에 협력해야 하는 서러움을 느껴야 했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