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도착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그리고 5일 12월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렇게 1차 1진 247명을 시작으로 파독 근로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1월부터 매월 4 째주 “파독광부 60년” 특집을 이들이 도착한 12월 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 1960년대 초반의 한국과 독일의 상황
1961년 한국정부는 「제 1 차 경제 개발 계획」을 야심차게 내놓고서는 그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군사 정권을 반대한 미국 F. 케네디 대통령은 대한 경제 원조를 박정희 군사 정권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그동안의 무상 원조를 중지하는 대신 그 자금을 상업 차관으로 도입하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외환 보유고가 열악한 국가 경제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입장이 아니었다. 또한 일본과는 아직 국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는 똑같은 분단국가인 서독에다 손을 내밀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미국 컨설팅사가 만든 「네이산보고서」등에 따르면, 1960 년 한국의 국민 1 인당 GNP는 평균 87 달러 수준이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최하위였던 인도의 70 달러에 이어서 한국은 두 번째로 낮은 수치였다. 그리고 국가 외환보유고도 겨우 2300 만달러에 불과했다. 그리고 수출이 겨우 3300 만달러인 반면에, 수입은 3 억 4400 만달러로 어마 어마한 큰 무역 수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런 적자 요인의 대금지급으로는 약 2 억 3200 만달러가 모두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결제할 정도로, 당시에는 원조에다 전적으로 의존하였던 기형적인 국가 경제 구조였다.
또한 실업률도 무려 23% 에 달하고, 물가상승률도 42% 수준이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미국의 대한경제 무상 원조가 중단되고, 그대신 상업 차관형식으로 변화를 한다면 기존 원조에만 의존하였던 한국 경제엔 거의 ‘결정타’였던 셈이다.
한국정부는 해외노동계약을 통한 노동자의 이주가 외환확보와 실업률저하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특히 해외주재노동자의 임금은 국내로 송금되어 직접적으로 산업자본의 형성에 일조할 것으로 판단했다.( Kim, Il Soo. 1981. New Urban Immigrants: The Korean Community in New York.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52) 이러한 견해를 기초로 1962년 3월 해외이주법이 선포되었다. 해외이주법은 이주유형을 집단, 계약, 특수이주로 구분하고 해외이주는 보건사회부의 허가를 통해 가능하게 했으며, 법인만이 해외이주민의 모집과 이주과정을 관리할 수 있다는 규정들을 명시했다.(외무부 아시아국,.『재외국민현황 1968: 463-464)
이주정책의 수립은 해외이주를 대행하는 법인들과 정부산하기관의 설립을 가져왔다. 이들 대행기관들은 1960년대 유럽과 베트남, 미국과 남미 등을 향한 한인노동자의 국제이주와 국민의 영주를 위한 이주의 형성과 지속에 기여했다. 예를 들면 주식회사 한백진흥은 정부의 허가를 토대로 브라질이주 지원자들을 모집해 1962년 12월 91명의 영주를 목적으로 한 한국인이주를 성사시켰다. 한편 정부에 의해 1965년 세워진 한국해외개발공사는 주로 노동자의 계약에 의한 해외이주를 관리했는데 대규모 노동력의 베트남과 독일 이주가 대표적 업무였다.(이광규, 재외한인의 인류학적 연구 1997: 221, 229-230)
특히 한국해외개발공사는 한인노동자의 독일이주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정부의 한인광부와 간호사이주의 대행기관으로서 한국해외개발공사는 독일광산협회와 독일병원협회 등의 독일고용주의 대표기관과 한인노동자이주에 관한 구체적 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한국에서 노동자 모집과 선발, 교육, 송출에 관한 과정을 전체적으로 관리했다. 그리고 공사의 교육과정에는 광부들의 광산실무교육과 간호사들의 독일어 언어교육, 그리고 동백림사건 이후 반공과 반북을 강조하는 소양교육 등이 포함되어졌다.(Kim, Yong Chan. 2006. ‘Migration System Establishment and Korean Immigrant Association Development in Germany and the United Kingdom’ 2006: 148-149)
– 독일경제의 성장과 노동력 부족
독일경제의 기적적인 성장은 경제성장, 고용, 통화안정, 재정균형 등의 영역에서 발군의 경제수행능력을 보여준 모델로 인식되어왔다. 독일경제의 성장은 양질의 생산을 위한 지식과 기술의 전통적인 인프라구조와 시장과 협력의 제도화된 네트워크 간의 공존의 결과였다. (Padgett, ‘Political Economy: The German Model under Stress’ 2003: 123-124) 이러한 독일경제의 성장을 위한 내부구조의 기능과 함께 독일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있어 외국인노동자의 기여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동유럽지역에 산재해있던 독일국민들의 대규모 유입으로 외국인노동자의 수요는 발생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초까지 수백만 명의 독일국민들이 서독으로 이주해왔고 독일경제에서 산업예비군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주해 온 독일인 노동자들은 난민과 추방자의 신분으로 서독으로 유입되었다. 유입된 독일인 노동자들은 기술자, 과학자, 장인, 의사 등의 숙련노동자들로 임금상승을 낮추는 중요한 자원의 역할을 했으며, 이들의 이주를 통해 독일은 경제성장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고 양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기간 손실된 노동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 특정 산업분야의 노동력 부족은 독일정부가 외국인노동자의 고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했다. 독일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1960년대 기존 농업과 건설업뿐만 아니라 기계와 화학 등의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외국인노동자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따라서 독일정부는 기존 남유럽뿐만 아니라 터키나 아시아 등으로 노동자의 충원 지역을 확대해갔다.(Castles and Kosack, ‘The Function of Labour Immigration inWestern European Capitalism’ 1972: 8-9) 1960년대 확대된 외국인노동자 유입정책은 또 다른 경제적 요인의 결과였다.
독일의 노동력에 기초한 경제구조는 어느 정도 투자와 생산의 위험성을 감수하며 기계화와 산업합리화를 추진하고 경제구조를 전환하기 위한 조건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최대한 노동력의 활용을 통한 계속적인 경제회복과 성장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고, 외국인노동자는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Martin, ‘Germany: Reluctant Land of Immigration’ 1994: 199)
1960년대 초 독일광산과 병원의 노동력부족이 한인노동자의 고용과 이주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1950년대부터 독일광부와 간호사들이 근로조건이 열악한 독일광산과 병원의 근무를 기피하면서 노동력부족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독일광산에서는 이미 1950년대 중반 이후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고용됨으로써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1945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는 1961년까지 천백만 명의 독일국민들이 서독으로 이주해왔다. 이후 950만 명의 외국인노동자들이 1954년부터 1973년까지 남유럽과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독일로 유입되었다. 1973년 외국인노동자 고용을 제한하는 조치 이후 약 4백만 명의 외국인노동자가 독일에 잔류했다)
1960년대 독일의 병원과 양로원에서도 일할 간호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1965년 한해의 경우에만 병원과 양로원에서 약 3만 명이 넘는 간호사의 신규 고용을 필요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한편 독일정부와 병원의 입장에서는 한인간호사를 포함한 외국인간호사의 고용을 통해 임금인상요구투쟁 등의 간호사노동조합의 활동을 약화시킬 수 있고, 경험 많은 외국인간호사의 충원을 통해 기술습득과 훈련에 필요한 비용과 각종 사회보장비용도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간호사의 유입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최다미, 재독한국여성모임.『재독한국여성모임 창립25주년 기념문집』2003: 139-140)
1304호 14면, 2023년 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