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광부 60주년 특별 인터뷰]
파독광부 1차 1진 유한석 원로를 만나다

금년은 광부 파독 6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해이다.

교포신문에서는 파독광부 1차 1진 유한석 원로님(85)과 인터뷰를 갖고, 파독광부 역사가 잊어져가는 사건이 안 되도록 신문을 통하여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어느나라 사람이던지 개척자들은 남다른 헌신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린 개척자적인 정신으로 다음에 올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또 성실한 한국사람으로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교포: 원로님 개인 소개를 부탁 드리고 독일에 오신 계기와 한국을 떠나기 전, 당시 국내 사정 등, 관련한 일에 대해 말씀 들려주시지요.

유한석: 공무원 출신인 선친께서 포경선 사업을 하다 도산한 이후, 급격히 기운 가세를 다시 일구고자 했던 그 와중에 서독행을 결심하게 되었고 1963년 12월 서독광부로 왔다

내가 서독 광부의 길을 택한 것은, 첫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둘째 기회가 된다면 동생(당시 서울대 미대 재학 중, 나중에 중앙대 교수 유정민 교수)학자금을 대주고 싶어서였다.

그 무렵 나는 대구 동촌에 있는 농업진흥청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근무를 하던 중 우연히 신문에 난 서독광부모집 광고를 보는 순간 눈이 번뜩였다. “나에게 온 기회”라고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서독 광부 모집에 지원하게 됐다. 경주에 내려와 집안어른들에게 이야길 하고 나니 머리엔 온통 서독이란 미지에 땅, 서독에 대한 기대로 가득찼다.

고향 경주에 내려가 들어보니, 내 또래 젊은이들이 나를 제외하고도 6명이 더 지원한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7명은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를 보내주며 서독 땅에서 청운의 꿈과 경주 젊은이들의 호연지기를 한번 활짝 펴 보이자는 각오를 보였다.

아쉽게도 그들 여섯명은 신체검사 등, 까다로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고 다시 낙향에 길에 올랐다. 최종적으로 보니 나는 120-130대 1 이란 바늘구멍처럼 높은 경쟁률을 통과했다는 놀라운 일을 실감하게 됐다.

당시 지원자들의 직업은 각양각색이었다. 진짜광산경험자부터 자유당시절 국회의원보좌관, 혁명후 국토건설대 차출을 피해 지원한 사람, 중,고등학교 교사, 사업을 접은 사람, 영관, 위관 군장교 출신 등, 다양한 사람들이 지원했으며 그때 이미 높은 경쟁률을 보며 여길 통과할 수 있을까?란 염려도 앞섰다.

그런 경쟁률 속에서도 우리들은 당시 일반인들 누구나 몸에 지니고 있던 기생충 검사반응결과(8mm반경이하)등, 까다로운 신체와 체력검사도 거쳐야만 했다. 당시 기생충 검사는 매우 철저하고 중요하게 진행됐다. 기생충이 발견되는 사람은 마지막 단계에서 또 다시 탈락이 되곤 했다.

1963년 12월 3일 강원도에서 광산현장교육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서독행산업전사환송회, 여권 교부 등의 절차를 거쳐 12월 21일, 우리는 에어프랑스로 서독 행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 타 보는 외국 비행기가 나로서는 신기했으며 우리 모두는 비행기 안에서 두리번거리며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아! 진짜 떠나게 되는구나! 라는 특별한 감회에 빠져들었다.

부모님과 형제와의 이별에서 오는 서러움도 잠시 3년 후에 맞게 될 고국의 삶을 생각하며 우리들의 꿈을 실은 비행기는 김포를 떠나 알라스카 앵커러지 공항에 잠시 쉬었다가 서독 뒤셀도르프공항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우리는 독일 루르지역 두 군데(함보른광산, 메르크슈타인 아돌프광산)로 약 60명씩 분산 배치되었다. 나는 아헨에 근처에 있는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으로 배정되었다. 지정된 숙소, 페스탈로치 촌에는 이미 독일 젊은 사람들을 포함,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온 광부들이 살고 있었다.

1차 1진 장성 교육필 기념식(1963.12. 03,맨 뒷줄 우측 4번째가 유한석 원로)

우린 페스탈로치촌장의 안내로 숙소를 배정받아 기숙하게 되었다. 10제곱미터 크기 방에는 하얀보가 덮힌 깨끗한 침대, 책상, 의자, 옷장이 하나씩 있고, 벽을 향한 3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부엌과 샤워 등, 씻는 곳은 공동으로 사용하게 설비가 되어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던 시대, 도착하여 보니 여자 분들이 운전하는 모습, 먹는 일로 문제가 없는 서독, 한국에서는 달걀 하나라도 상에 올라오면 집안 어른에게나 돌아가는 그 어려웠던 시절, 그때는 참 슬픈 시절이었다. 라며 눈시울을 붉힌다. 당시 광부가 아니면 해외를 갈수 없던 시대, 한달 월급 700마르크를 벌면 한국의 장관월급보다 더 많은 월급수준이었다.

지상교육을 받으며 입항전 최종 신체검사가 이루어졌고 누군가의 몸에서 규정이상의 기생충반응이 발견됨으로서 입항이 늦어지게 되었다. 문제는 기생충검사에서 제동이 걸린 것이다. 당시 영국산 알고파라는 구충제가 있었으며 우리 모두는 구충제를 복용하고 몇차례 결과를 기다린 끝에 약 3개월이 지나서야 입항허가가 떨어졌다.

교포: 탄광노동에 따른 말씀을 드려주시지요.

유한석: 다들 알지만 지하 1천미터 기온이 40도에 가까운 막장은 가만히 있어도 숨이 콱콱 막힌다. 그런 곳에서 우리들은 하루 종일 노동을 했다.

우리들 경우, 거의가 광산경험이 없는 동료들이었지만 눈썰미도 좋고 모두가 맡은 곳에서 열심히들 일을 했다. 매일 매일이 힘든 일과였지만 큰돈을 번다는 생각에 큰 어려움 없이 견디는 듯 보였다.

한국 강원도에서 본 광산과는 완전 딴판인 독일광산은 길이와 폭이며 모든 것들이 큼지막했으며 안전장비 또한 훌륭했다. 우리에겐 큰 물병을 좌우에 차고 안전필터, 모자 등 배터리를 허리에 차고 움직이는 것이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했었으나 얼마 시간이 흘러가니 그것조차 제법 자연스럽고 익숙해 졌다.

광산에서 우리가 할 일은 지하에서 석탄을 캐내는 일이었다. 굴을 뚫으면서 크로네라는 천정받침작업을 하며 먼저 나가고 탄맥을 따라 움직이며 채탄, 이를 지상으로 운반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를 위해 기자재 운반하기, 보수와 굴착작업이 반복적으로 천장과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둥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지하 막장 현장에서 동발을 철수하다 큰 사고가 발생했다. 나와 한방에 살던 동료(이 모씨)가 숨지는 사고였다. 같은 방에 살던 찜머 콜레게였다. 태극기가 덮힌 관을 붙잡고 오열하며 우리 60명 광부는 눈물로 며칠을 지새웠다. 먹고 쓸 것이 없어 그 가난을 털어내고자 이곳 서독 땅에 왔는데 싸늘한 시체로 관 안에 누워있는 그를 보며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다.

앞으로 전진하며 뒷 부분 동발을 철수하는 과정에서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실수였다. 사전에 교육받은 바로는 동발을 빼 낼 때에는 항상 안전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이곳 서독탄광은 도급(게링엔)이라는 형태로 자기가 수행한 작업량대로 돈을 버는 방식이었다. 이러니 돈 버는 것이 30-40%가 월급차이가 나기도 했다. 3년이란 정해진 기간 동안 우린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가능한 연장근무, 주말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하에서 땀에 절어 일을 하고나면 어떤 누구라도 맥이 다 빠지곤 했다. 우리는 그런 지친 몸으로 그날 잠을 청하고 새벽같이 또 작업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일하는 지하 작업장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곳 같이 잦은 사고로 들것에 실려 나가는 동료들을 쳐다볼 때 마다 쇠동발을 부여안고 우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주눅든 위축된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며 제발 사고없이 3년 근무를 마쳐야 한다는 각오를 매일 매일 마음에 새겼다.

우리 1진이 아돌프광산에서 근무 3년차에 접어들 때였다. 이웃 광산인 지어스도르프 에밀마이리쉬 광산에서 “탄맥이 잔뜩 깔린 항이 무너져 폐항 할 처지에 놓였다”.라며 “아돌프광산에 근무하는 한국인 광부들을 혹시 보내줄 수 있겠느냐?”고 문의가 있었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광산근무실력들은 인정받았다.

우리들이 그곳으로 얼마동안 파견되어 정말 어려웠던 작업환경을 재정비하고 정상적인 채탄항으로 돌려놓았던 일은 지어스도르프 광산에서 전설같은 일화로 늦게 온 이들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오기도 했다. 당시 이런 소문이 루르광산지역에 펴저 나가면서 광산 측에서는 한국인들을 선호하는 입장들을 보였다고 한다.

혹시 일본인 광부를 현장에서 보셨느냐? 는 질문엔 우리가 아돌프광산에 입항하고 보니 일본인광부들은 국가계약으로 이미 다 돌아간 이후였으며 루르지역에서는 일부 일본인 광부들과 함께 근무하는 일이 있다고 들었음을 밝혔다.

교포:정착과 독일생활 60년동안 인상 깊었던 일이 있다면,

유한석: 나는 임기가 끝날 때쯤 나중에 결혼한 독일여인과 열애에 빠졌었다. 3년 만기가 가까이 오며 몇몇 동료들은 귀국을 기피하며 숨어 생활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당시 국가간에 맺은 계약기간 3년을 마치고 독일에 더 체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우리들은 개척자로서 남다른 헌신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우린 개척자적인 정신으로 다음에 올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또 성실한 한국사람으로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반년쯤 지나 몇백명이 가을에 추가로 온다는 말을 듣고 우린 모두 기뻐들 했다. 봐라 무어라고 했나, 우리가 열심히 잘해야 하는 까닭이었다라고 서로를 격려했다. 이듬해 10월, 이들을 환영하러 공항까지 나갔던 일이 생각난다.

여러 가지지 잊지 못할 일들이 있지만 난생처음 비행길 타고 서독에 온 일, 기생충사건으로 3개월여 마음 조리며 입항을 기다리던 일이 꿈만 같다. 서독에 온지 1년이 지난 64년 12월 10일, 우리나라 대통령이 독일에 왔고 우리 광부들을 찾아준 일이다.

없는 나라에서 돈 벌러 나온 우리들, 우리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한 나라 대통령과의 만남은 과히 극적이라고 표현해도 심한 말이 아닐 것이다. 대통령은 나라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한 탓에 여러분이 이 먼 타국에까지 나와 고생이 많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말을 들은 우린 물론, 그 강당은 온통 눈물바다가 됐었다.

그로부터 50년, 아버지에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독일 순방 마지막 일정으로 가진 동포간담회에서 받은 깊은 인상과 그 이후 귀국하여 보내 온 감사편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날 박대통령은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 일일이 손을 잡고 인사를 하고 당시 노고를 치하했다.

파독광부, 간호사들의 피땀이 조국의 산업을 일으켰다는 당시 인사말에서 50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아버지가 경제개발을 위한 종자돈을 빌리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을 때 그 분들과 만나 애국가를 부르며 함께 눈물을 흘렸던 일화는 아직도 우리 국민들 가슴 속에 깊이 남아있다고 한 말을 듣고 50년전 생각에 한없이 눈물을 흘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귀국하여 나에게도 감사편지를 보내 주었다. 근면하고 정직하게 묵묵히 일하셨던 여러분들의 모습을 본받아 우리 대한민국은 오늘 세계 속의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여러분의 노력, 그리고 헌신과 희생에 모든 국민의 마음을 모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편지에 적혀 있었다. 그리고 동기중 제일 기억나는 인물로 수년전 고인이 된 박석봉씨가 지하광산에서 보여 준 우수한 한국인 실력 등, 그 가정과도 나눈 특별한 인연도 털어놓았다.

교포: 한국사회, 독일사회, 또는 자식세대에 대한 바램이 있다면,,

유한석: 나는 아돌프 광산근무를 마치고 바이어에 취직하였으며 레버쿠젠 바이어에서

연금나이까지 근무하였다. 사별한 첫 부인사이에 남매를 두었으며 애들은 새해나 생일날 방문하는 등, 자녀들과의 관계는 매우 원만하다. 그 인연으로 아들이 바이어에 간부직원으로 현재 재직중이며 큰딸애도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 나이까지 독일에서 60년을 살아 온 나는 마음에 체증 같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두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조국을 떠나 외국에 나와 살면서 한국인이라는 이름 아래 우린 하나가 되어야지, 출신지역이 다르다고, 또 정치성향이 다르다고 편 가르고 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그 오랫동안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또 최근엔 한국이 잘 살아졌다니 고마운 일이긴 하나, 자살률이 제일 높다는 소식도 자주 듣는다. 그 옛날 없이 살 때는 자살 소식을 듣기가 어려웠는데 이렇게 잘 살게 된 세상에서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우리가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대한민국 정부가 잘 되길 바라고 우리 한국사람이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젊은 시절 흘렸던 땀과 수고가 담긴 역사와 우릴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여기 독일에 남아 사는 우리들은 여생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바쁘게들 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서로들을 위하며 힘든 주위와 이웃들을 함께 살피며 살아갔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1310호 10면, 2023년 4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