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 170

19세기 철강혁명의 선두주자 티센과 크루프

독일을 대표하는 철강기업인 티센크루프(ThyssenKrupp)는 1999년 3월, 독일의 주력 철강사인 티센(Thyssen)과 크루프(Krupp)의 합병으로 탄생하였다.

티센크루프는 현재 전 세계 80개국에서 철강뿐만 아니라 자동차 부품 생산, 엘리베이터 제작 및 플랜트 엔지니어링 등의 다양한 사업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2015년 기준으로 매출 430억 유로, 종업원 15만 5,000명을 거느린 글로벌 기업이다.

합병 전에도 두 회사는 이미 19세기 철강혁명의 선두 주자였고, 제1·2차 세계대전의 핵심 군수업체이자 전후(戰後) 라인강의 기적을 주도한 기업으로서 세계 철강 산업 및 독일 제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크루프 1811년 설립, 이음새 없는 바퀴테 최초 개발

먼저 크루프의 역사를 살펴보자. 18세기 말, 영국에서 최초로 평로(平爐), 전로(轉爐), 전기로 등에서 용해한 강(鋼)을 주형에 주입하여 소정의 형상이나 크기로 성형하는 주강(鑄鋼) 기술이 발명되었으나 기술 유출을 엄격하게 봉쇄하고 철강 제품을 선별적으로 수출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이에 1811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크루프(Friedrich Krupp)는 영국 독점의 주강기술을 자체 개발하기 위하여 독일 중부 에센(Essen)에 주강공장을 설립하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독자적으로 주강기술을 개발하였고, 1852년에는 세계 최초로 이음매 없는 강철 철도 ‘바퀴테’ 생산에 성공하였다.

당시 유럽 각국의 철도 확장에 힘입어 크루프는 앞선 철도 기술을 바탕으로 성장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후 크루프는 3개 철도 바퀴테를 포개놓은 모양을 회사의 상표로 채택하였다.

크루프가 개발한 주물대포는 유럽 내에서 평판이 좋았으며, 1859년 프러시아가 다량 구매하면서 크루프는 군수사업을 기반으로 또 한 번 크게 성장하게 된다.

1862년에는 쇳물을 대형용기(전로戰虜)에 담고 밑으로부터 전로 안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불순물을 제거하는 세계 최초의 저가 대량 강철 생산기술로, 1855년 영국 헨리 베세머가 발명한 베세머 제련법과 1864년 독일 태생으로 영국에서 일하던 윌리엄 지멘스와 프리드리히 지멘스가 베세머 제련법을 개선하여, 쇳물에 예열된 공기와 가스를 위로부터 쇳물 속으로 분사해 집어넣는 기술을 개발한 평로제강법을 세계 최초로 적용하면서 철강 대량생산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후 광산 및 운송회사를 건립하면서 철강 생산부터 판매까지 수직 계열화를 완성하여 독자적 경쟁력을 확보하였다.

1826년 프리드리히를 이어 2대 경영을 시작한 알프레드(Alfred)는 일찍이 산업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각종 제도를 도입하였다. 직원들을 위한 직급체계 확립, 질병, 장례, 산재장애인 및 퇴직자를 위한 기금 조성, 직원을 위한 주택, 병원, 학교, 교회 등을 건설 지원하였고, 1872년에는 포괄적인 복지제도를 회사의 공식 지침으로 공표하였다.

그 결과 크루프 직원들은 열광적으로 그를 따르게 되며, 독일 비스마르크 총리는 크루프의 포괄적 복지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 차원의 사회복지제도를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다.

전쟁과 함께 성장한 철강 기업 크루프, 유럽 최대 기업으로

1870년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은 유럽 철강기술의 경연장이 되었다. 보불전쟁은 세계적 명성의 크루프포를 가진 독일이 승리했지만, 이는 다가올 세계대전의 서막이 되었다. 이후 제 1·2차 세계대전은 프랑스와 독일 간의 영토 확장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철강생산의 주원료인 철광석과 석탄을 차지하려는 양국의 갈등도 있었다.

당시 프랑스 철광석의 90%가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독일 석탄의 45%가 루르 지역에서 생산되었는데, 철강산업을 위해 프랑스는 석탄이 필요했고, 독일은 철광석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크루프의 3대 경영자 프리드리히 알프레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1902년 그의 큰딸 베르타(Bertha)가 경영권을 맡아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1912년에는 세계 최초로 스테인리스 스틸을 개발하였다. 크루프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17년 420mm 곡사포 ‘빅 베르타(Big Bertha)’와 파리 폭격에 사용된 사거리 130km의 ‘파리 건(Paris Gun)’을 제조하였다.

또 연합국을 긴장시킨 U보트도 제작하면서 군수업체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무기 제조가 금지되자 기업의 일부가 해체되고 고용인 수도 줄어들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크루프는 무기 생산을 재개하면서 다시 성장하게 되었다.

이 당시 크루프는 독일 내 87개 산업공단과 110개 기업에 대한 지배주식을 보유하였고, 그 외 142개 독일 기업에도 막대한 자금을 출자하였으며, 41개 해외공장의 지분보유 및 수천 개 광산, 호텔체인, 은행, 시멘트 공장, 부동산 등을 소유한 유럽 최대 기업이었다.

전후 알프레드 크루프의 전범 처벌과 미국의 크루프 재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4대 경영자 베르타의 장남인 5세 경영자 알프리드 크루프(Alfried Krupp)는 전범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지분 75% 매각 명령을 받았지만 매입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점차 심화되면서, 미국 점령군은 크루프의 회사 경영을 재개시키게 된다. 이후 크루프는 라인강의 기적을 이끌며 새롭게 성장하여 196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총자산규모 10억 달러 수준으로 재건되었다.

한편 알프리드의 외아들 아른트는 가문의 사업을 잇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설립된 공익재단 ‘알프리크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가 1968년 크루프의 최대주주가 되었다.

1345호 29면, 2024년 1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