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 176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하인젤만(Heinzelmann) 라디오

1930년 22살의 나이로 뉘른베르크(Nürnberg) 인근 퓌르트(Fürth)에서 라디오 가게를 창업했던 막스 그룬디히(Max Grundig)는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라디오 생산 및 판매사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한편, 종전 후 모든 방송영역에 대한 조사와 생산은 초기 군정청(연합군) 체재 아래서 철저하게 통제를 받고 있었는데, 배급표를 통한 구매 프로세스를 가지고는 좀처럼 판로를 확대하기 어려웠다.

반면에 일반 소비자들의 정보와 오락에 대한 갈구는 커져만 갔고, 이를 간파한 막스 그룬디히는 튜브가 없는 라디오 수신기 키트(Kit)인 ‘하인젤만(Heinzelmann)’을 이듬해 시장에 선보였다. 소리가 나지 않는 나무박스 키트는 군정청의 생산량 통제를 받지 않고 시장에 판매할 수 있었는데, 소비자들은 군정체제에서 활성화되고 있던 블랙마켓에서 튜브를 구매, 조립해서 라디오 방송을 수신할 수 있었다.

1948년 화폐개혁을 통한 안정적인 경제상황은 소비재 수요를 자극하였고, 같은 해 약 4만대의 ‘하인젤만’을 판매하며 비약적인 성장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룬디히의 성공 독일국민의 성공

1949년 소비재 수요팽창, 하인젤만을 통한 시드머니 확보 및 군정종식에 따른 자유로운 경영환경 아래에서, 생산설비를 확장하여 다양한 형태의 라디오 생산을 15만대까지 늘리며 그룬디히는 1950년대 중반 유럽에서 가장 큰 라디오 생산회사가 되었다. 1952년 독일 TV방송채널 개국과 함께 독일 최초로 TV를 생산하며 독일 국민에게 눈과 귀를 열어 주며, “다시 회복한 독일인의 정체성과 감정”을 전송해 주었다.

1960년대 북아일랜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해외에 테이프 레코더, TV공장을 확대하며 1960년 매출 4억4천5백만 도이치 마르크(DM)를 실현하였는데, 이는 1950년 4천4백만 DM의 10배가 넘는 규모였다.

창립자 막스 그룬디히는 고객들이 거실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칼라 TV 및 녹음기와 오디오 세트가 합쳐진 최고의 제품을 시장에 출시하였다.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성공을 가로막다T

1970년대 가전부문을 필두로 그룬디히의 성장은 지속되었다. 카세트 데크(Cassette deck) 하이파이 시스템, 슈퍼칼라 TV, 니치마켓용 포터블 칼라 TV, 카 오디오 스테레오 시스템 등 신규제품을 출시하면서 외연을 확대하였고, 1978년 당시 대형투자가 필요한 비디오 레코더 생산을 시작하였는데, 1979년에는 30개 공장, 3만8천명 종업원과 함께 전성시대를 구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의 성공은 내일의 성공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창립자 막스 그룬디히는 쉬지 않고 일하는 것 이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고, 자신의 스태프와 경영진을 제대로 조직화하지 못했고, 그가 만든 성공에 집착해서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유연성이 결여된 완고한 리더는 견고한 독일식 고급제품에만 집착했고 소통에 취약했다. 내부 조직력, 글로벌 네트워크, 브랜드가치 등 앞으로 닥쳐 올 글로벌 환경변화에는 대비하지 못했다.

네덜란드의 필립스(Philips)는 이 부분에 있어 상대적으로 유연했고, 대응이 빨랐으며, 경쟁상대를 꿰뚫어 보며 그룬디히의 지분을 꾸준히 확보해 나갔다.

표준경쟁 참패 유럽시장에서 소니(Sony)가 질주하다

1980년대 가전시장의 주류로 비디오 레코더가 급부상 하였다. 초기시장은 제조업체별로 표준이 달랐지만 시장의 고속성장과 더불어 비디오 표준경쟁은 절대절명의 내용이었다. 그룬디히는 필립스와 협력하였으나 미국영화사들이 VHS를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전자업체들이 VHS로 비디오를 만드는 가공할 만한 규모의 경제 앞에서 커다란 손실만 본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CD 표준경쟁에서도 마찬가지 결과였다. CD는 그룬디히의 기술력도 문제였지만 비디오 표준에서 낭패를 보았던 소니가 음반관련 자회사를 보유하고 있었던 필립스와 협력을 꾀한 탓에 초반에 표준경쟁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두 차례에 걸친 표준경쟁에서의 패배와 더불어 1980년대 미국시장을 접수한 소니를 필두로 한 일본 TV의 유럽진출은 유럽 TV 제조업체의 몰락을 가져왔고, 그룬디히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자업계 글로벌 성장기였던 1980년~1990년간 10년의 매출변화를 보면 그룬디히는 29억DM에서 46억DM으로, 5%대 연평균 성장률을 보였다. 블루오션 지대에 있던 비디오 레코더 시장진입 실패와 레드오션 지대로 진입하던 TV시장에서의 경쟁력 약화가 동반된 버거운 성장이었던 반면, 소니는 제품경쟁력을 갖춘 TV, 오디오를 주력으로 42억불에서 183억불로 15%대 연평균 성장률을 보이며 질주하였다.

끝없는 추락 터키 가전업체의 자회사가 되다

미래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그룬디히는 1980년 첫 적자시현을 신호탄으로 급격하게 경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1개 공장을 폐쇄하고 종업원을 감축하는 1차 구조조정이 곧 이어졌다. 규모의 경제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일본업체의 진출에 대처하기 위해 텔레풍켄

(Tlelfunken), ITT와 같은 기업과 결합하여 단단하게 전투력을 갖추자는 창업자 막스 그룬디히의 EURO 비전은 동종업계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1984년 그룬디히는 당시 지분을 30% 이상 확보한 필립스에 경영권을 매각하였다.

이후 필립스 경영체제에서 다소 안정되는 모습도 보였으나 1990년대 들어 경영상태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장기간의 시장침체, 가격경쟁 심화, 도이치 마르크 강세 등 악재가 산재하였는데, 통독으로 잠시 생성되었던 동독 특수가 구조조정 타이밍마저 놓치는 결과를 만들면서 손익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1997년 당시 경영상태가 좋지 않았던 필립스가 그룬디히 지분을 정리한 후, 그룬디히는 장기간 표류하며 파산보호 신청 끝에 2007년 터키 전자업체 아르체릭(Arcelik)에 인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