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세계 1위 S/W솔루션 기업 SAP의 신화 ➀

독일은 전통적으로 제조업이 강한 나라이다. 철강, 화학, 기계, 중 전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도로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독일산 자동차까지 말이다. 그런데 제조업이 아닌 소프트웨어 산업 분야에서 미국의 공룡기업들과 함께 자웅을 겨루며 독보적인 위치로 성장하여 세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독일기업이 있다. 바로 독일 하이델부르그 부근 발도로프에 본사를 둔 SAP사(이하 SAP)이다.

마이크로 소프트·오라클과 경쟁하는 세계 3위 기업 SAP

SAP는 2016년 포브스에서 선정한 ‘S/W & Programming’ 분야 기업 규모에서 마이크로 소프트와 오라클(ORACLE)에 이어 3위로, 미국 이외 업체 중 1위를 차지했다. 또한 밀워드 브라운이 발표한 2016년 가치 있는 브랜드 순위 22위, 영향력 있는 B2B 브랜드 6위, 테크놀로지 분야 기업 7위 등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1972년 5명의 엔지니어가 창립하여 52년이 지난 지금 글로벌 IT 기업으로 성장한 SAP의 성공비결을 알아본다.

기업의 숨어있는 니즈(Needs)를 파악하여, ERP 시장 개척

기업은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매일 수많은 거래가 발생하며 이러한 거래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것은 기업에 있어서는 일상의 업무이고 매우 중요한 일이다. 즉 기업은 경영관리, 세무관리 및 투자관리 등을 위하여 기업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기록 보관하고 분석하여야 하며 주주에게도 보고하여야 한다. 기존에는 이러한 업무를 수작업으로 처리해야 했기에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70년대부터는 컴퓨터를 활용하게 되면서 업무 효율화에 획기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각 업무 단계별로 데이터가 개별 처리되다 보니 단계별로는 효율적이었으나 기업 내부에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된 업무를 처리하는 데는 여전히 수작업을 필요로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생산, 판매, 회계, 인사 등 각 업무별 시스템을 통합하여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ERP시스템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이라면 ERP시스템 도입은 필수 사항으로 이제는 중소기업에까지도 보급되어 회사 운영의 핵심인프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이러한 ERP의 개념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회사가 바로 SAP이다.

기술의 발전에 맞춰 발빠르게 변화

SAP는 설립 초기부터 비즈니스 활동과 데이터 처리 사이에 생기는 시간차가 없도록 실시간(Realtime)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환경을 구축하였는데 당시에는 획기적인 기능이었다. 예를 들자면 영업매장에서 물건을 판매하여 영수증이 발급되면 그 데이터가 전산 처리되어 본사의 영업, 회계, 생산 등 관련 부서에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시스템 환경이 구축된 것이다. 이는 종전에 물건을 판매한 전표를 모아서 본사로 보내고 이를 다시 관련 부서에 수작업으로 통보해야 하던 것을 실시간 작업으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이 시스템은 시장의 좋은 반응을 얻었고 상당한 수익을 거두는 원동력이 되었다. SAP가 세계적 소프트웨어 업체로 성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90년대 초반에 컴퓨팅 환경이 바뀌면서 찾아왔다. ‘클라이언트/서버’로 불리는 새로운 환경으로 인해 기업들은 더 많은 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컴퓨터 용량 증설에 대한 요구가 많이 발생했다.

SAP는 새로운 환경의 장점을 활용하여 용량을 증설할 때 전체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기존 시스템의 단점을 개선하여 서버만 추가하면 되는 새로운 시스템(SAP R/3)을 출시했다.

이 시스템은 도이췌 포스트, 벤츠 등 유럽회사뿐 아니라 코카콜라, 제너럴모터스 등 소프트웨어 강국인 미국의 주요 대기업에까지 판매되어 SAP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전문 분야에 집중하여 패키지 형태로 판매

기존에는 ERP시스템과 같은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체 인력을 활용하거나 시스템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에 의뢰하여 회사 맞춤형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는 업무 프로세스 설계, 시스템 개발, 테스트로 이어지는 긴 과정으로 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하더라도 새로운 시스템이 국제표준에 맞게 적절히 구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SAP는 패키지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다. 국제표준을 기준으로 프로세스를 설계하고, 다양한 업종인 제조, 건설, 서비스 유통 등에 적용 가능하며 별도의 개발 없이 시스템의 설정을 바꾸는 것만으로 업무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한 것이다.

패키지 방식은 새로운 표준을 적용할 때도 매우 유용하여, 새로운 국제표준이 출현하더라도 SAP를 사용하는 회사는 이러한 변화에 쉽게 대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법률 조항이 변경되어 국제표준회계기준인 IFRS(International Financial Reporting Standards)를 적용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독자적으로 개발된 시스템인 경우 기존 시스템을 폐기하고 재개발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SAP를 사용하는 회사라면 IFRS를 지원하는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방법으로 쉽게 IFRS를 적용할 수 있다.

장인(Meister) 정신으로 만든 맞춤형 시스템

미국은 대량생산과 기계화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는 효율성이 장점인 반면에 모든 고객에게 같은 제품, 서비스,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단점이 있다. 반대로 독일은 ‘장인정신’에 입각하여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익숙한 나라이다.

SAP는 창립 초기에 먼저 주문한 고객의 요구사항을 맞추기 위해 다른 고객과의 계약은 뒤로 미루고 선(先)주문 고객에게 최적화된 시스템을 제작하는데 집중했다고 한다. 여러 고객이 요구한 시스템을 맞춤 제작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시스템을 개발해 놓고 보니, 나중에 주문한 고객들에게도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SAP는 이 시스템을 국제표준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고객의 상황에 맞게 설정을 바꿀 수 있는 맞춤형 시스템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미국의 IT기업들과는 차별화된 SAP만의 고객 맞춤형 시스템은 바로 이런 독일의 장인정신에서 탄생되었다.

1354호 29면, 2024년 3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