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

9/ 삶을 관통하는 행복의 공식

어느 해 겨울이었다. 여행처럼 훌쩍 떠난 한국행이었다. 순전히 어머니를 위한 행로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별 후, 기억의 흔적을 끌어안고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어머니는 오랜 세월 묵혀 두었던 하모니카를 꺼내들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칠십 중반의 어머니는 ‘고향의 봄’의 음률 속에 마음을 내맡겼다. 그리고 반백 년을 함께 한, 남편이 떠난 자리에서 부단히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굳은 의지 같았다. 문득 독일에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그들은 나의 부모와 동시대를 걸었지만 생의 어느 길목에서 고국 땅에 머문 자와 떠난 자로 갈렸다. 갈림길은 달랐지만 노년의 추상은 ‘고향’으로 귀결되었다.

노년의 언덕에 서면 본능의 회귀와 함께 유년의 기억을 더듬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그것은 다가올 미래보다 지나온 과거가 더 미화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노년에 남은 것은 맹수처럼 달려드는 죽음 뿐이라고 체념하기도 한다. 노년기에는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사멸에 대한 공포가 존재한다. 약병 수는 늘어가고 뼈마디는 쑤시다. 손에서 발까지 닿는 유동성도 더디다. 이러한 우울한 관점은 생물학적 나이를 더 재촉한다. 하지만 생명이 유지되는 한 노년에도 성장과 쇠퇴가 반복된다. 관건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성장의 열쇠를 잡으려는 노력이 바로 웰리빙(Well-living)이다. 긍정적인 노화를 위해서는 살아있는 동안의 성장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포기해야 할 나이에 새로운 꿈을 꾸는 노년의 삶을 가끔 접하곤 한다. 98세에 첫 시집 ‘약해지지마(くじけないで)’를 발간한 시바타 도요(99). 그녀는 전문작가가 아니었다. 백발의 나이에도 성장을 꿈꾸던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입증했다. 삶의 왕성한 의욕과 호기심이 어쩌면 그녀의 생명 연장을 부추겼는지 모른다. 주변에는 한창의 나이지만 꿈을 잃어버린 청춘도 있다. 노년은 신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사단법인 <해로>의 활동 중에는 이러한 어르신들의 성장을 돕는 프로그램이 있다. 문화 아카데미로, 친목과 소통은 물론 더 나아가 도전과 앎의 기회가 된다. 호흡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주 한 번씩 열리는 ‘노래교실’은 음악을 전공한 봉지은 대표가 메가폰을 잡는다. 봉 대표는 어르신의 눈높이에 맞춘 센스와 감각의 소유자다. 그녀는 어르신들의 내면을 때론 동심으로, 때론 감성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다. 2시간여의 몰입이 끝나면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일 주일에 한 번씩 만남을 가진 그들은 모임을 통해 새로운 삶의 동력과 에너지에 불을 지핀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단절되었던 만남이 조금씩 열리면서 문화 아카데미에 참석한 어르신들의 표정도 더욱 밝아졌다.

기타교실도 인기 프로그램이다. 인기가 많아 강좌가 3개로 늘어났다. 손가락의 운지를 사용하면 치매에 좋다는 조언도 한 몫 한다. 기타 강사로는 정종미, 고성준, 노상현 씨가 수고하고 있다. 굳은 손가락을 기타의 네크 위에 올려놓고 줄을 튕기다 보면 엔도르핀과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넘실거린다. ‘로망스’를 배우면서 아르페지오의 세계를,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첫사랑의 풋풋한 감성을 추억한다.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간의 친밀감을 확인한다.

최근 몇 년 동안 <해로>에서 기타를 가르치는 정종미 강사. 그녀 자신 또한 즐거움의 심연 속으로 빠진다고 말한다. 어르신들과의 고요한 소통을 통한 위로는 마치 이국생활의 선물처럼 달콤하다. 이외에도 <해로>는 양로원에 계시는 이들을 위해 ‘찾아가는 음악회’을 열기도 한다. 음악을 공부하는 유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주축이다. 그들의 방문은 건조해진 삶의 마지막에 촉촉한 단비가 되어준다. 아날로그 어르신들을 위한 스마트폰 교실도 간간히 열리고, 젊은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독일어 교실과 이민법 강좌는 세대를 연결하는 지렛대 역할이다. <해로>는 한인 여러 세대를 담은 그릇이 되어 우리 모두가 늙어간다는 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인다.

어디선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긍정적으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기쁨과 사랑, 그리고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인생마다 주어진 수명은 다르지만 삶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성장하느냐, 쇠퇴하느냐는 선택이다.

노년은, 수고하고 달려왔던 삶을 조금씩 내려놓고 내면의 성장을 꿈꾸는 시기다. 그래서 행복의 완결은 노년에 결정된다. Ende gut, alles gut!

박경란/ 사단법인 <해로> Alltagshilfe 자원봉사팀장

후원문의: 이메일: info@heroberlin.de/ 홈페이지: www.heroberlin.de


2015년에 시작된 HeRo(해로)는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늙어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코멘트에서 출발했다.

해답은 늘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도움활동의 필요성으로 귀결되었다. <해로>의 입술로 연재를 시작하지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재독 동포들의 목소리를 그릇에 담으려 한다. 이 글이 고단한 삶의 여정을 걷는 이들에게 도움의 입구가 되길 바란다(필자 주)

2020년 7월 10일, 1178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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