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의 한국 문화재 (14)

독일에서 한국으로 반환된 한국문화재들 ➀

그동안 한류를 통해 한국 문학, K-Ppo, K-Beauty, K-Drama 등 다양한 한국 문화가 독일에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2018년 기준 독일 내 한국 문화재는 총 1만876점. 일본,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우리 문화재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하다. 더욱이 독일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 규모가 유럽 국가 중 최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예술 전문가가 거의 없다는 점은 매우 안타깝기만 한 현실이다.

실제로 독일 박물관은 엄청난 양의 한국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문화재는 동아시아 미술품으로 광범위하게 분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및 중국 문화재에 밀려 학술적 연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한국 문화재를 2000점 이상 소장하고 있는 베를린인류학박물관, 함부르크 Museum am Rothenbaum이 단 한 점의 한국 문화재도 전시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렇듯 오랜 기간 한국 문화재는 그 가치가 발견되지 않은 보물 상태로 머물러 있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특집연재 “독일 속의 한국 문화재”를 통해 독일 내 한국문화재의 현황을 소개하며, 재독한인들과 한국 정부의 “독일 속의 한국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자 한다.


겸재정선화첩

“이 화첩이 독일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높이 평가받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반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국인과 한국의 역사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겸재정선화첩>을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오틸리엔수도원 안에서 아무런 이견이 없었습니다.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수도원 장로회도 만장일치로 반환을 추인했습니다. 반환 결정은 올바른 것이며,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뭔가를 주려면 기꺼이 줘야 합니다. 저희 화첩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에 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겸재정선화첩’은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총아파스(대원장)가 1925년 한국 방문 중 수집해 독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가 처음으로 화첩을 발견하고 관련 논문을 발표하면서 국내에 존재가 알려지게 됐다.

 이후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의 노력으로 2005년 10월 22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왜관수도원에 영구 대여의 형식으로 반환했다.

이 <겸재정선화첩>을 2005년 한국에 가지고 온 이는 왜관수도원의 선지훈 신부였는데 선 신부는 비행기 안에서 11시간 동안 먹지도 잠자지도 않고 버텼다고 한다. 그 까닭은 겸재의 그림이 집에 돌아오는 그 곁을 한시라도 허전하지 않게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겸재정선화첩>은 겸재의 진경산수 화풍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매우 훌륭한 그림인 <금강내산전도>를 비롯하여 모두 21폭의 그림이 실려 있다.

“오틸리엔수도원 슈뢰더 아빠스를 비롯한 수도원 식구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우리는 겸재의 귀중한 그림을 돌려받을 수 있었게되었다” 선지훈 신부는 당시 언론에서 소감을 밝힌 바 있다.

한편, 이 화첩을 1976년 독일 수도원에서 발굴해 학계에 소개한 미술사학자 유준영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겸재 작으로 전하는 작품 중 상당수가 위작 시비에 시달리고 있으나 화풍 등 여러 측면에서 보아 이 화첩은 그런 시비에서 자유롭다”며 “화첩에 수록된 그림은 소재에 따라 ‘중국 고사도’, ‘중국 은둔자’, ‘금강산’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또 화첩의 작품성보다 오히려 그 유전 과정에 많은 사연이 있다고 밝혔다.

이 화첩은 독일기업가들과 함께 1924년 한국을 방문해 금강산을 찾은 베버 수도원장이 내금강산에 있던 장안사호텔에서 입수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유 교수는 말했다. 당시 금강산 일대에는 그림상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런 그림들 중에 겸재의 화첩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유 교수가 소개한 이후 이 겸재 화첩은 도판 형태로 학계에 자주 소개되곤 했다.

 ‘겸재정선화첩’은 정선이 비단에 그린 21점의 그림으로 구성됐다. 진경산수화·고사인물화·산수인물화 등이 함께 담겨 있어 정선의 다채로운 예술세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다. 21점 중 금강산의 전체 경관을 담은 ‘금강내산전도’와 내금강의 명소를 그린 ‘만폭동도’, 외금강의 명소인 ‘구룡폭도’ 등 금강산 그림 3폭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조선시대 보병 갑옷 면피갑

조선시대 후기 보병(보군)들이 입었던 면직물로 만든 갑옷인 ‘면피갑’이 100년 만인 2018년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8년 5월 30일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박물관으로 부터 면피갑을 기증받아 이를 공개했다. 1910~1920년대 독일로 나간 것으로 보이는 이 갑옷은 18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국내외에 10여벌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면피갑은 길이 101㎝, 어깨너비 99㎝로, 겉감에는 앞뒤로 둥근 못을 촘촘하게 박았고 연화당초무늬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겉감 뒤쪽에는 안감과 같은 색상인 푸른색 띠가 세로로 길게 남아 있다. 안감에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옻칠을 한 가죽 3겹으로 만든 갑찰들을 붙여놓기도 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차미애 팀장은 “현존하는 면피갑은 10여벌 밖에 없는 실정이라 조선시대 갑옷이나 복식 연구 등에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차 팀장은 “면피갑은 1808년 편찬된 서적 <만기요람>(萬機要覽), 1813년 나온 <융원필비>(戎垣必備) 등에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며 “<만기요람>에는 ‘피갑 2892벌을 보군에게 나눠줬다’는 기록이 있으며, <융원필비>에는 면피갑이 그려져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돌아온 면피갑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에는 삼각형 모양의 천을 덧붙인 ‘무’도 남아 있다. 무는 옷의 폭을 더 넓히고 활동성을 높이기 위한 용도다. 차 팀장은 “무는 19세기에 이르면 거의 사라져 이 면피갑은 18세기 경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면피갑이 독일로 나간 시점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지만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신부들이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1910~1920년대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1190호 30면, 2020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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