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 아동을 소개합니다.

어제 소주를 좀 과하게 마신 탓인지 속이 쓰려 시원한 국물생각이 나서 순대국 집에 들어갔습니다. 순대국 한 그릇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음식점 출입문이 열리더니,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어른의 손을 이끌고 아주 느릿느릿 식당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의 남루한 행색은 누가 봐도 걸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은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봐요, 가뜩이나 손님도 없는데 다음에 와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앞 못 보는 걸인 남자의 손을 이끌고 음식점 중간쯤 자리에 앉았습니다.

<저어…..아저씨 순 대국 두 그릇 주세요>. <응, 알았다. 근데 얘야, 이리 좀 와볼래.> 계산대에 앉아있던 주인은 손짓을 하며 아이를 불렀습니다. <얘야, 미안하지만 지금은 너에게 음식을 팔수가 없구나. 네가 앉은 자리는 예약 손님들이 앉을 자리여서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주눅이 든 아이는 식당 주인의 말에 낯빛이 금방 시무룩해졌습니다. <아저씨 빨리 먹고 나갈께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에요…….> 열 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그 여자 아이는 찬 손바닥에 꽉 쥐어져 눅눅해진 천원짜리 몇 장과 한 주먹의 동전을 꺼내어 주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알았다… 그럼 빨리 먹고 나가야 한다.>

잠시 후 주인은 순대국 두 그릇을 그들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계산대에 앉아서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빠, 내가 소금 넣어 줄께>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금대신 자신의 국밥 그릇으로 수저를 가져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국밥 그릇 속에 들어있는 순대와 고기들을 하나, 둘 떠서 앞 못 보는 아빠의 그릇에 담아 주었습니다.

<아빠. 소금 넣고 간 맞추었어. 이제 어서 먹어, 주인아저씨가 우리 빨리 먹고 가야한 댔으니까 어서 먹어. 내가 김치 올려 줄께.> 수저를 들고 있는 아빠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식당주인은 조금 전 자신의 행동에 가책을 받았는지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곳을 보는 척 하면서도 그들의 자리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순대국을 시켜서 반쯤 먹고 있었던 나는 웬일인지 더 이상 숟가락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3인분의 순대국 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빨갛게 상기된 내 얼굴위로 펑펑 함박눈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내 자신이 대견해 보여 웃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인 1974년 7월, 내가 석탄 캐는 광부로 독일로 떠나기 직전의 대한민국의 순대국 한 그릇 값은 99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난히도 순대국밥을 좋아하였었던 나는 한국을 떠나오기 전날에도 순대국 밥과 찐빵을 사 먹고 왔습니다.

어느 지인이 저에게 보내주신 위의 글을 읽으면서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딸이 아버지를 그렇게도 극진히 섬기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생일을 맞이하는 한 아빠의 순대국밥 잔치에 함께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그것보다 자신의 그룻에 담겨있는 모든 고기와 순대를 건져서 아빠의 그릇으로 옮겨주며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던 그 여덟 살 짜리 여자 이이가 몹시도 보고 싶습니다.

오늘 소개드리는 이 영호 아동은 경상북도에서 여동생과 함께 할머니의 슬하에서 양육 받고 있는 남자 아동입니다. 아버지의 인터넷 도박중독으로 부모님은 이혼하고, 엄마가 두 자녀를 길러왔지만, 제대로 돌보지 않아 아동방임으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신고되어 두 남매는 지체장애 1급인 고모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러나 사정상 다시 할머니에게 맡겨져 지금은 할머니가 두 남매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따로 거주하고 있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전혀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아버지의 도박 빚으로 전세금마저 탕진한 후, 지금은 방 한 칸에서 월세 생활을 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영호 아동은 2022년 현재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아동은 건강한 편이며 학교생활 및 교우관계는 원만한 편입니다. 이 영호 아동의 장래 희망은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영호아동에게 교민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 270만 동독인들은 자유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1954년 그러한 무리와는 반대로 오히려 서독에서 동독 쪽으로 가고 있는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서독 출신의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 가족입니다. 그 이유는 서독에는 목회자가 넘쳐나는데, 동독의 목회자들이 모두 서독으로 내려와 동독은 목회자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카스너 목사는 서독 함브르그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태어난 지 6주 된 딸까지 있었습니다. 이 신생아를 데리고 아무런 연고도 거처도 없는 동독 땅을 향하여 떠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셔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그 놀라운 사랑을 동독 땅에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품에 안겨 동독으로 갔었던 목회자의 딸은 아버지의 엄격하고 철저한 신앙의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 딸이 독일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앙겔라 메르켈 총리입니다.

저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나, 여덟 살의 나이로 눈먼 아버지의 손을 이끌며 아버지의 생신 날 따뜻한 순대국 한 그릇을 대접하는 대한민국의 딸아이나, 하나님 앞에서 똑 같이 인정받고 사랑받는 아이들이라고 말 하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분만이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민 여러분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박 해 철 선교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