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짙어가는 라인강가의 한가위소풍
라인강가에 가을이 막 익어가기 시작한 지난 10월 11일, 우리나라에서는 한가위 명절을 지내고 있을 그 때에 칼스루에 한인회(회장 이종원) 주최한 가을 소풍이 개최되었다.
고국에서는 보름달 아래 온 가족이 모여 송편을 빚고 차례를 지낼 시간, 이곳 독일 땅에서 살아가는 한인들은 칼스루에 인근 하겐바흐 강변에 모여 또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다.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만나는 우리 한인들.
처음 만났을 때는 낯선 타향살이의 동질감으로 시작된 인연이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 끈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이제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끈끈한 유대감으로 이어진 ‘타향의 가족’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날 소풍에는 칼스루에 지역은 물론 제법 먼 거리의 한인들도 참석했는데 각자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한가위 소풍을 즐기기 위해 기꺼이 긴 여정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1년에 한 번, 이 만남만은 꼭 지키려고 해요. 여기 오면 고향에 온 것 같거든요.”
한 참석자의 말처럼, 이 자리는 단순한 소풍이 아니라 흩어져 살아가는 한인들에게는 작은 고향이자, 마음의 안식처인 셈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칼스루에 한인회 이종원회장이 앞으로 나섰다. 집안 장조카 같기도 하고, 이웃집 아저씨 같기도 하고, 친정 동생 같기도 한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슈투트가르트, 비스바덴에서, 심지어 프랑스에서까지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반가움이 묻어났다. 특히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이들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오늘 한가위를 맞아 이렇게 함께 모일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고국에서는 가족들이 모여 명절을 보내고 계시겠지만, 우리도 여기서 이렇게 가족처럼 모였으니 뜻 깊은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편안하게 즐기시고, 맛있는 음식 많이 드시고, 좋은 추억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짧지만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일 잘하고 믿음직한 회장이 있어 든든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우리 한인 모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한식 뷔페다. 이날도 어김없이 긴 테이블 위에는 참석자들이 각자 정성껏 준비해 온 음식들이 가득 차려졌다. 취나물 고추나물 들나물 등의 건나물 무침, 무 배추 오이 고추 등을 소재로 한 김치류, 각종 나물과 해산물, 과일에 이어 숯불에 잘 구워진 불고기와 소시기, 마치 한가위 차례상을 연상케 하는 풍성한 상차림이었다.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는 이 시간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다. 저마다의 손맛이 담긴 음식 하나하나에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모인 사람들에 대한 정성이 배어 있다. 누군가는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했을 밥반찬들, 누군가는 전날 밤 늦게까지 만들었을 조림들을 나누며, 우리는 음식 이상의 것을 나누고 있었다.
식사가 한창일 무렵, 회장이 다시 한 번 사람들 앞에 섰다. 이번에는 새로 온 분들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오신 임해숙씨, 배구선수 출신이십니다, 훤칠한 키가 역시 선수시네요!”
회장의 익살스러운 소개에 웃음이 터졌다. 이어서 회사원 박지현씨와 황재홍씨, 그리고 지역 명문대 kit에 재학 중인 정의영씨가 차례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남부한인회장협의회 조윤선 회장은 아욱스부르크 행사에도 참석하느라, 식사를 마친 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아쉽게도 소개시간을 함께 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하며 회장은 마치 오래 알던 사람처럼 편안하게 분위기를 이끌었고, 참석자들은 따뜻한 박수로 새 식구들을 환영했다. 이렇게 새로운 가족이 더해지면서, 우리의 공동체는 조금씩 더 커지고 있었다.
타향에서 나누는 경사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강보식, 두미정씨 부부가 귀하게 싼 큰 보자기를 펼치자 그 안에는 색색의 고운 송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희 딸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준비했어요.”
딸을 시집보낸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함께 미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딸은 이곳 독일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역 한인회 어른들이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온 아이였다. 예쁘고 재능 있던 그 아이가 학교를 다니고, 성장하고, 이제 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소식은 참석자 모두에게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어머, 우리 꼬마가 벌써 결혼을?”
“폴짝 뛰며 뛰어놀던 게 어제 같은데…”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축하의 말을 건넸고, 누군가는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를 시집보낸 부부가 돌리는 송편을 받아 드는 사람들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그 작은 떡 한 조각에는 부모의 정성과 기쁨이, 그리고 이 타국의 한인사회가 함께 나눈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타향에서 맞이한 자녀의 경사를 고국의 아름다운 풍습대로 이웃들과 나누는 모습, 그것은 단순히 떡을 나누는 행위를 넘어 우리의 정서와 전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이었다. 색색의 송편을 입에 넣으며,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 가족의 경사를 축하했다.
“고국에 계셨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 쉽지 않았을 텐데, 여기서 이렇게 나눌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타국살이가 외롭고 힘들 때도 있지만, 이렇게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한인회의 진정한 의미였다.
민병재 전회장이 준비한 특별한 시간
올해 소풍에도 지난 봄소풍에서처럼 특별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민병재 전 한인회장이 아이들과 어른들을 위한 퀴즈 시간을 따로 마련한 것이다.
먼저 아이들을 위한 퀴즈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전통, 명절, 동요 등에 관한 문제들이 출제되었고, 아이들은 손을 번쩍번쩍 들며 열심히 답을 외쳤다. 정답을 맞힌 아이들에게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이 전달되었고, 아이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런 시간은 자신의 뿌리를 자연스럽게 배우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먼저 아이들을 위한 퀴즈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전통, 명절, 동요 등에 관한 문제들이 출제되었고, 아이들은 손을 번쩍번쩍 들며 열심히 답을 외쳤다.
“1년은 12달인데, 어떤 달은 31일로 끝나고 어떤 달은 30일로 끝나죠. 그럼 28일이 들어가는 달은 몇 개일까요?”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 아이가 외쳤다. “전부요! 모든 달에 다 28일이 있어요!” 순간 어른들 사이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작년 퀴즈대회 챔피언이었던 한국인 3세 최윤미어린이였다. 지난 번 퀴즈대전에서 거의 모든 문제를 혼자 맞혀 똑똑함을 과시했던 일로 “위의 어린이는 칼스루에 한인회에서 마련한 레크리에이션 키즈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므로 이에 상장과 부상을 수여합니다.” 라는 글귀의 한국어와 돌일어로 상장을 받았다.
어른들의 퀴즈 차례가 되자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넌센스 퀴즈가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초성 속담 맞히기에는 정답을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모습이 마치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이거 알던 속담인데!”, “아, 맞다, 이거였어!” 하며 추억을 되살리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순수한 즐거움이 묻어났다.
공기놀이와 호두줍기 산책,여유로운 오후 시간
식사 후에는 공기놀이도 시작되었다. 작은 돌멩이 다섯 개를 땅바닥에 놓고 하는 이 소박한 놀이는, 많은 이들을 단번에 유년 시절로 데려갔다.
자리를 펴고 앉아 능숙하게 공기를 던지고 받는 손놀림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소꿉친구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곳 독일 땅에서 되살아났다.
“손에 감각이 그대로 남아있네요. 몇 십 년 만에 하는데도.”
한 참석자의 말처럼, 몸이 기억하는 놀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공기놀이를 하며 깔깔대는 어른들의 모습에서는, 국적도 나이도 잊은 채 순수하게 놀이에 몰입하던 어린 시절의 그 아이들이 보였다.
점심을 먹고 놀이를 즐긴 후,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강변을 따라 산책을 나섰다. 가을 햇살 아래 반짝이는 강물과, 노랗게 물들어가는 나뭇잎들은 이국땅에서도 계절의 아름다움은 변함없음을 일깨워주었다.
산책길에서는 자연스럽게 호두 줍기가 시작되었다. 나무 아래 떨어진 호두를 주우며 아이들은 보물찾기라도 하듯 신나했고, 어른들은 “이거 가져가서 호두과자 만들어야겠네” 하며 웃었다. 작은 일상의 즐거움이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K-문화의 확산, 자랑스런 우리 한국인
오후의 담소 시간에는 자연스럽게 K-Pop과 K-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북한이냐, 남한이냐”는 질문부터 받아야 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지금 유럽에서의 K-문화 열풍은 감개무량한 일이다.
“요즘 독일 애들도 BTS 노래 부르고, 한국 드라마 보고, 한국 음식 먹는 거 보면 정말 신기해요.”
“우리 애가 학교에서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친구들이 부러워한대요.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이처럼 짧은 시간에 우리 문화가 이곳 유럽에서 대중화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참석자들은 자랑스러움과 함께 묘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는 한류의 경제적 효과를, 누군가는 문화적 의미를, 또 누군가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자녀를 둔 부모들은 K-문화의 확산이 아이들이 자신의 뿌리에 자부심을 갖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 이제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설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강변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은 하나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각자가 온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회장은 떠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친정 동생이 언니를 배웅하듯, 조카가 삼촌을 전송하듯, 이웃집 아저씨가 이웃을 배웅하듯.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2026년 2월 7일 우리 칼스루에한인회 신년회때 꼭 다시 봬요. 약속이에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똑같이 정성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손을 잡은 사람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렇게 진심으로 반겨주고 아쉬워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타향살이가 조금은 덜 외로웠다.
“내년에 또 만나요!”
“건강하게 지내다가 봐요!”
작별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함께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이 만남을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를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단순히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모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할 수 있는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칼스루에 한인회의 가을 소풍은 매년 반복되는 행사이지만, 그 의미는 해마다 깊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함께 나누고, 한국의 정체성을 이어가며, 다음 세대에게 뿌리를 심어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한가위 보름달이 뜨는 고국 땅에서는 가족들이 모여 송편을 나누고 있을 그 시간, 이곳 독일에서는 또 다른 가족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추억을 나누었다.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한가위 보름달처럼 둥글고 환하게 이어져 있는 우리 한인들.
오래오래 함꼐 하며 더 많은 이야기를, 더 깊은 정을, 더 끈끈한 유대감을 나누게 될 것이다. 타향에서 만든 이 작은 한인 공동체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견고하고 아름다운 가족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본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 주간에 함께 한 이날의 기억은, 각자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따뜻하게 남을 것이다.
이영수기자 julee33333@gmail.com
1431호 20면, 2025년 10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