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삶의 첫 시작.

태연 Henze

400명이 넘는 20대 어린 한국 여자들을 태운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비행기가 뜨자 비행기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난 며칠 수학여행 갔다 올 거라는 생각으로 착각하고 있다가 모두들 울어서 얼떨떨했다.

60~70년대에 한국이 살기 힘들어 독일에 인력을 보내는 계약이 이뤄졌고, 간호사와 광부들을 독일로 보냈다. 난 앞으로 나에게 닥쳐 올 독일 삶이 어떨 거라는 상상조차도 해 본 적도 없이,내 나이 갓 20세에 별안간에 생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 것이다.

언젠가 남편과 두바이에 갔을때, 두바이 공항에 20대쯤 되어 보이는 동남아 여자애들이 무슬림인지 모두들 머플러를 머리에 쓰고, 3~400명가량이 비행장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봤을 때, 우리가 처음 독일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저런 모습이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도 두바이로 일하러 온 것이겠지…

당시 프랑크푸르트 비행장에 도착하니 각자 독일 병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는 대로 그 사람들을 따라가야 해서 거기서 우리와 같이 비행기 타고 갔던 이들과 헤어지게 되었고, 나와 다른 10명은 병원쪽 사람들이 가지고 온 버스를 타고 우리가 일할 병원으로 갔다. 어떤 애가 버스 창밖을 내다보며 넓다란 들과 밭을 지나고 있으니 우리는 분명 어떤 시골로 떨어진 건가봐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독일은 도시와 도시 사이엔 밭과 들, 숲들이 있곤 하다.

난 그때 일들이 아주 희미하게 기억 날 뿐이다. 우리가 온것을 축하한다고 병원 측에서 환영회를 했던것 같고, 우리는 기숙사 방으로 각자 배치가 되었고,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독일 간호원이 나를 기숙사 내 방으로 안내하며 뭐라고 했는데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간호학원 다닐 때 일주일에 한 번씩 독일어를 배웠었는데 기억도 안 나고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독일말 한마디도 못하면서 독일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냄비와 그릇 등 부엌살림을 살 돈을 병원 측에서 선불로 주었고, 독일에 온지 벌써 5년이 되었다는 한국 간호사 한명이 우리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물건들을 샀고, 우리는 모든게 새로워서 구경하느냐고 정신이 없었다. 우리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동양 사람들을 처음 보듯이 쳐다봤다. 우리가 도착했던 72년도에는 독일에 동양인들이 흔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면서 난 도저히 여기서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계약한 3년을 견디나 하는 걱정이 됐다. 우리 병원에는 독일에 온지 3~5년이 된 한국 간호원 언니들이 30여명 정도 있었는데, 난 그들을 보며 어떻게 그렇게 긴 세월을 여기서 살았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 언니들은 모두 한국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에서 왔고, 그녀들은 이미 독일 생활에 적응되어 있어서 행동하는 거며 옷 입는 식이 독일 스타일을 따라하고 있는 듯 했다.

우연히 나랑 같이 온 애들 중에 서울에서 온 애들이 4명이 있었고 우리는 나이도 같았다. 걔네들도 나 같은 경우였다. 독일에 온 간호원 중에 서울에서 온 애들은 1% 정도로 아주 드물었다.

난 내 생전 처음 받은 첫 월급으로 제일 먼저 물감, 화판, 이젤 그리고 카세트 플레이어가 들어있는 라디오를 사서 시간 나는 대로 한국에서 가져온 한국 음악을 틀어놓고 기숙사 방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독일 음식들은 도저히 입에 안 맞아 먹을 수가 없어서 기숙사 부엌에서 같이 온 애들과 밥을 해 먹기도 했는데, 그때는 한국쌀 같은 것이 없어 베트남산 길쭉한 쌀로 밥을 했고, 배추라는 것도 시장에 없어서 먼저 온 언니들이 양배추로 만든 김치를 나눠 주어 먹었다. 난 조금씩 언니들한테 김치 만드는 것도 배우고 다른 반찬하는 것도 배워 혼자 만들어 보기도 했다.

처음 도착한지 2주일쯤 지나서인가… 우리는 각자 한국 간호사들이 있는 병동으로 배치가 되었고 먼저 온 한국 간호사에게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를 배당받은 한국 간호사 언니는 충청도에서 왔다는데 예쁘게 생겼고 웃으면 아주 귀여워 보였다. 그 언니는 간호사 가운을 입고 행동하는 것이 독일 여자들 같았다.

늘 상냥하고 생글 생글 웃어서 수간호사가 그 언니를 좋아했는데, 수간호사는 어린애 같은 (그때 독일 사람들은 나를 12살쯤 먹은 애로 생각했다) 나한테는 아무래도 불안한지, 못 마땅한 듯 심술난 얼굴로 대했다. 난 코끼리 같이 덩치가 크고 발목도 코끼리 발같이 굵고 걸음도 뒤뜽거리며 걷는 50대의 전형적인 독일 노처녀 수간호사가 무서웠다. 특히 한국 언니가 없는 날엔 쥐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어 있고 싶었다.

난 아침에 병동에 들어가면 수간호사에게 아침 인사를 상냥하게 하려고 저녁마다 침대에서 “Guten morgen, Schwester Elisabeth“를 수없이 연습을 했었지만, 그 여자만 보면 무서워서 온 몸이 굳어져 한마디도 내 입에서 안 나왔다. 그 병동의 모든 간호사들은 수간호사가 무서워 모두들 웬만하면 그녀를 피하며 말없이 일했고, 오로지 한국 언니만 수간호사 비위를 마치며 생글 생글 웃으며 일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지옥에 끌려가는 것 같이 근무를 했고, 웬만한 병동에서 하는 기초 일은 능숙해졌는데, 난 간호과장한테 가서 울면서 수간호사가 무서워서 그 병동에서 일을 못 하겠다고 못하는 독일말로 사정 얘기를 했더니(누군가가 나한테 간호과장한테 가서 말하라고 헀던 것 같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간호 과장이 웃으며, “그러면 다음주 월요일부터 8층에 있는 남자 외과 병동으로 출근하라”고 하며 내가 귀여운 듯이 내 등을 쳐 주었다.

외과 병동에 오니 여기는 먼저 병동과는 달리 수간호사며 모든 간호사들이 20대들이라서 늘 간호사 방은 담배 연기로 안개 낀 런던 같았고 장난치며 즐겁게들 일했다. 그때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할 때여서 이 병동 간호사들의 가운도 모두 미니로 짧게 입어서 나도 내 가운 길이를 줄였다.

먼저 병동은 모든 간호사들이 수간호사가 무서워서 눈치를 보며 말없이 일만 했는데, 여기는 병동 분위기 자체가 달라서 일 하면서 재미있고 동료들이 나한테 독일어를 가르쳐 주곤 했다. 환자들도 교통사고, 스키 타다 사고 등… 대부분 젊은 남자들이라서 우리가 환자 방에 들어가면 휘파람 불고 환영까지 하며 장난들을 쳤다. 환자들이 나보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으면 한국에서 왔다 하면 그 당시 독일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 줄도 몰랐다.

의과 대학에서 곧바로 온 의사(인턴)들은 우리와 나이가 몇 살 차이일 뿐이어서 의사들과 우리 병동 간호사들은 간호사 기숙사 지하실에 있는 방에서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파티를 자주 했다. 늙은 독일 간호사들은 모두 코끼리 같고 웃음도 없고 무서운 인상을 가진 여자들이 많은 반면, 젊은 간호사들은 명랑하고 예쁘고 장난꾸러기들이 많았다.

내가 독일말도 웬만큼 하고 병동 일도 능숙해지자, 교대로 하는 밤 근무도 시켰다. 밤 근무는 혼자서 30여명의 환자를 돌보는 일이였는데,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아침근무를 가야되는 것이 늘 힘들었던 나는 오히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밤 근무 차례가 돌아오면 좋았다.

간호사 일의 의미를 조금 알게 되었을 때 쯤, 난 20년 동안 했던 병원 일을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간호사 일은 재미도 있었지만 나에겐 웬지 적성에 안 맞는것 같아서 늘 남의 집에 얹혀사는 기분이었다.

예술인으로의 길로

늘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그냥 취미로만 그리고 있는 게 아까우니 예술이 무언가를 알려면 예술 학교에 들어가 보라”고 남편이 나에게 권했다. 내가 학교에서 나온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어떻게 공부를 또 하냐고 하자 “한번 해봐. 꼭 그 학교를 졸업 안 해도 되잖아. 하고 싶을때 까지만 해 봐.“ 라고 응원해 주었다.

난 그의 말대로 학교에 원서를 냈고 내가 그린 그림 20장이 들어 있는 포트폴리오를 제출했고, 얼마 후에 구두시험을 보러 오라는 통지가 와서 구두시험을 보았다. 얼마 후에 합격했다는 통지가 와서 드디어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어 뛸 듯이 기뻤다. 그래서 내 나이 45살에 난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애들과 함께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에 처음으로 갔을 때, 학교 분위기를 보고 ‘바로 여기가 내 세상이네!’ 라는 생각을 했다. 조각실에서 작업복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작업하는 이들, 물감투성이가 된 작업복을 입고 엎어져서 서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이들. 그들은 바깥세상과는 아무 상관없이 모두들 예술에 미쳐 있었다. 우리 과의 어떤 애는 일찍 임신을 해서 애를 낳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바닥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우리 과에 나보다 훨씬 나이 먹은 사람들이 3명 있었는데, 언젠가 부턴 우린 서로 나이 차이도 의식 못하고 그냥 예술에 미친 학생들이었다.

난 내가 타고 다녔던 차를 그냥 대학생들이 타고 다니는 차로 바꾸었고, 내 복장도 다른 애들과 같이 운동화 신고 청바지와 골덴바지만 입고 다녔다. 학교를 다닌 이후 내 일상생활이 완전 바뀌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늘 힘들었던 내가 새벽 6시면 학교로 향했고, 종일 작업실에서 작업하다가 강의 들으러 가야했고 저녁 늦게 집에 왔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오늘 배운 것과 강의 들은 것을 얘기하면, 남편은 이튿날 그것들에 관한 책을 사서 읽고 나에게 또 설명해 주곤 했었다.

그 때 마침 내 딸 나타샤는 11학년 때 미국으로 1년 교환 학생으로 가 있었다.

내 남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래 예술학교에 들어 가는게 꿈이었는데, 부모님들의 반대로 하고 싶었던 예술 공부를 포기했단다. 남편은 이따금씩 우리 학교에 와서 우리가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즐겼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내가 하는 것이 자랑스러웠었던 것 같다.

당연히 시 부모들은 “살림이나 하지 무슨 공부냐”고 나만 보면 뭐라 하셨다. “공부를 하려면 돈 벌수 있는 거를 해야지 쓸데없는 예술 공부가 뭐냐고…”. 하고 싶을 때 까지만 한다고 시작한 공부가 재미있어서 4년이 어떻게 지난지도 모르게 지나갔고 드디어 졸업하게 되었다. “너희들 지금 공부할 때가 제일 좋은 시기야. 사회에 나가면 힘들어…” 종종 이런 말을 교수가 했지만 우리 귀엔 안 들어왔다.

졸업하기 전에, 교수가 이제 “너희들이 많이 배웠으니, 앞으론 어린애들 같이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라고 했다. 우린 그때는 아직 그 말을 이해 못했었다. 우리는 둘러앉아서 “우리보러 이제 어린애들 같이 그려야 된다하시면, 우리가 4년 동안 배운 것은 뭐지?” 하며 웃었고. 한 학생이 말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틀려졌어” 맞는 말이었다. 우리의 세상보는 눈이 틀려졌다.

우리가 입학했을 때 같이 시작한 학생들 중에 3분의 1만 졸업을 했다. 1학년말에 가망성이 없는 애들은 떨어져 나갔고, 2학년 말에 또 많이 떨어져 나갔다. 3학년 말에도 또…

졸업식 때 교수 한 분이 무대에 서서 졸업생 하나 하나에 대해 어떻게 그림을 시작했고 어떻게 발전을 해 왔다는 것을 상세히 말씀 하시는 것을 들으며, 교수님들이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과에서 제일 나이 먹은 베안트와 내가 상을 받고 졸업했다. 졸업 전시회 때 내 작품이 갈레리스트 한테 뽑혀서 졸업하자마자 난 개인 전시회를 하게 되었다.

난 졸업 이후 전시회도 일 년에 수 없이 많이 했지만, 늘 미학에 대한 책을 읽으며 집에서 지금까지도 계속 공부한다. 대학에서 배운 것은 토대일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예술은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흥미롭다.

삶은 하나의 아름다운 긴 여행이고,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인 것 같다. 물론 삶을 걸어오며, 돌에 걸려서 넘어질 때도 있었고, 상당히 피곤할 때도 있었고, 길을 잘못 들어서 쩔쩔매며 후회할 때도 있었고, 곧장 가도 되는 길을 돌아서 간적도 있었고….

모든 일들은 벌어져야 했었기에, ‘그냥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하는 삶에서 모든 두려움이나 겁이 사라졌을 때 모든 것에서 인간은 자유스러워 진다.

삶의 진실을 알기 까지 많은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며, 그 속에서 자신이 익어가야 하는게 아닌지….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 오는 것이고, 난 내 죽음은 드디어 자유인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서 내 죽음을 편히 맞아들이리라. 딸에게도 엄마는 드디어 자유인이 된 것이니, 내 장사날 꽃 장치를 하고 친구들과 즐거운 파티를 하라고 했다.

나이를 의식하지 말고 그냥 내가 느끼는 데로 사는 거다. 내 인생을 천천히 돌아보니, 많은 일을 겪고 살면서 실수도 많이 했지만, 내가 어리고 어리석어서 걸었어야 했던 길이였기에, 그리고 그 길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여기이고… 나는 내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1464호 14면, 2026년 6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