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독일 ‘노년 공동거주’의 확산
– 혼자 사는 노년에서 함께 사는 노년으로

어느 순간부터 독일의 아파트 창문들에는 저녁 불이 하나씩만 켜진다.
식탁 위에는 한 사람 몫의 접시가 놓이고, 텔레비전 소리는 대화를 대신한다.
이 풍경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독일의 노년은 점점 더 조용해지고, 점점 더 혼자가 되고 있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함께 늙어갈 사람은 줄어들었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뒤 홀로 남은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자녀들은 각자의 삶의 도시로 흩어지고, 명절의 식탁도 해마다 작아진다. 그렇게 노년은 어느 날 갑자기 ‘혼자의 삶’이 된다.

독일 사회에서 노년의 삶은 더 이상 가족 안에서 자연스럽게 보호받는 시간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평균 수명은 늘어났지만, 노후를 함께 보낼 사람은 줄어들었다. 배우자 사별, 자녀의 독립과 원거리 거주, 이혼 증가 등으로 인해 혼자 노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최근 독일 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대안이 바로 ‘노년 공동거주(Senioren-WG)’이다. 이는 단순한 주거 형태를 넘어, 고령화 시대에 노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 사회적 실험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령화 독일, 달라진 노년의 풍경

독일은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20%를 넘어섰고, 80세 이상 고령 인구의 증가 속도는 더욱 빠르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1인 노년 가구의 급증이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노년층의 절반 가까이가 혼자 살고 있다는 통계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독일 사회에서 노년의 고독은 더 이상 개인의 감내로 넘길 문제가 아니다. 혼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닫히고, 몸은 약해진다. 누군가와 나눌 사소한 대화 하나가 사라진 자리에 불안과 침묵이 들어선다. 긴 밤, 갑작스러운 어지럼증, 도움을 청할 사람 없는 순간들. ‘고독사’라는 단어가 신문 지면에 오르는 이유다

혼자 사는 노년은 자유롭다는 장점도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움은 깊어지고, 몸이 불편해질수록 일상의 작은 일조차 부담이 된다.

요양원 말고 다른 선택은 없을까

전통적으로 노년의 돌봄은 요양원(Pflegeheim)이 맡아왔다. 그러나 요양원은 많은 노인들에게 여전히 심리적 문턱이 높은 공간이다.

많은 노인들에게 요양원은 삶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종료처럼 느껴진다. 정해진 시간표, 낯선 공동생활,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은 아닌데”라는 마음. 아직 걷고, 아직 요리하고, 아직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데 말이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내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또한 요양원은 비용 부담도 크다. 월 수천 유로에 달하는 비용은 연금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독일 사회에서는 요양원 입소 시기를 최대한 늦추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노년 공동거주다.

노년 공동거주, 어떻게 사는 곳인가

노년 공동거주는 말 그대로 ‘함께 살되, 각자의 삶은 유지하는’ 주거 형태다. 요양시설과 달리, 집이라는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입주자들은 각자 독립된 개인 공간을 갖는다. 부엌, 거실, 세탁실, 정원 등은 공동으로 사용한다. 식사와 외출, 생활 리듬은 개인이 스스로 결정한다. 필요할 경우 외부 방문 간호나 가사 지원 서비스를 개별 또는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다.

즉, 보호받는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 존중받는 구조다.

이곳에서 노인들은 다시 ‘입주자’가 아니라 ‘주인’이 된다. 각자의 방이 있고, 각자의 생활이 있다. 다만 부엌과 거실을 함께 쓰고, 때로는 식탁을 나눈다. 누군가 커피를 끓이면 냄새가 복도를 따라 퍼지고, 누군가는 그 향기에 이끌려 문을 연다.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는 공동거주 모델

노년 공동거주는 입주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 자발적 노년 WG

뜻이 맞는 친구나 지인들이 직접 집을 구해 공동 생활을 시작한다. 자유도가 높지만, 갈등 조정과 행정 업무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 협동조합·비영리 운영형

주택협동조합, 교회, 복지단체가 운영한다. 임대 안정성이 높고 장기 거주가 가능해 가장 선호도가 높은 유형이다.

▶ 돌봄 연계형 Pflege-WG

경증 치매나 신체적 제약이 있는 노인을 위한 공동거주다. 간호 인력이 함께하며 요양원보다 가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한다.

▶ 다세대 공동거주(Multigenerationenhaus)

노년층과 청년, 가족 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방식이다. 노인은 삶의 경험을 나누고, 젊은 세대는 일상적 도움을 제공하는 세대 간 상생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비용 부담은 얼마나 될까

노년 공동거주는 요양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적 부담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대료는 지역과 형태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공과금과 관리비는 공동 분담하며 간호와 가사 서비스는 필요할 때만 선택적으로 이용한다.

무엇보다 연금과 주거 보조금(Wohngeld)으로 유지 가능한 경우가 많아, 현실적인 선택지로 떠오르고 있다.

제도적 뒷받침도 확대

독일 정부와 각 주 정부는 노년 공동거주를 공공 복지 정책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다.

공동거주 프로젝트 설립 지원, 무장애 주택 개조 보조금, 장기요양보험을 통한 간호비 지원, 지방자치단체의 상담 및 중개 서비스, 등 ‘가능한 한 오래 자기 집에서 살기’라는 정책 방향 속에서 공동거주는 제도적으로도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노년 공동거주는 효율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고령화 사회가 노년에게 보내는 하나의 답장이다.

“당신은 아직 사회 안에 있다.” “당신의 삶은 여전히 관계 속에 있다.”

독일의 지방자치단체와 복지 기관들이 이 모델을 지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능한 한 오래, 자기 삶의 중심에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노년 공동거주는 보호가 아니라 존중의 언어에 가깝다.

장점과 한계, 현실적인 고민

노년 공동거주의 장점은 분명하다.

사회적 고립을 줄이고, 심리적 안정과 삶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응급 상황에 대한 불안도 줄어들고, 요양원 입소시기를 늦출 수 있다.

반면, 생활 습관 차이로 인한 갈등, 사생활 침해 우려, 공동 책임 분담의 어려움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존재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많은 공동체는 입주 전 충분한 면담과 시험 거주 기간, 명확한 규칙을 마련하고 있다.

재독 한인 사회에 주는 메시지

독일에 정착한 지 반세기가 넘은 한인 1세대 이민자들이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고 있다. 산업 현장과 병원, 가정에서 쉼 없이 일 해온 세대이지만, 은퇴 이후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다. 가족은 흩어졌고, 언어는 여전히 장벽이며, 노년의 일상은 점점 고립으로 기울고 있다.

이러한. 언어 장벽, 가족과의 거리, 문화적 고립은 노년기에 더욱 크게 다가온다.

독일 한인 고령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분명하다.

첫째는 언어 문제다. 일상 회화는 가능하더라도, 의료·행정·요양 관련 전문 용어 앞에서는 여전히 불안이 크다.

둘째는 가족과의 거리다. 자녀 세대는 독일 사회에 완전히 정착했거나 다른 지역, 다른 나라로 이동한 경우가 많다.

셋째는 문화적 고립이다. 독일 사회의 복지 제도가 잘 갖춰져 있음에도, 정서적으로 기대기에는 여전히 낯설다.

이런 조건 속에서 혼자 사는 노년은 자유보다는 불안과 침묵에 가까워진다. 갑작스러운 건강 문제, 응급 상황, 행정 처리 앞에서 도움을 요청할 대상이 없다는 점은 한인 노년층에게 특히 큰 부담이다.

독일의 요양 시스템은 제도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지만, 한인 고령자들에게 요양원은 여전히 심리적 장벽이 높은 선택지다. 독일어 환경에 대한 두려움, 음식·생활 방식의 차이, 문화적 소통 부재, ‘가족에게 버려진다’는 정서적 인식 등으로 인해 많은 한인 노년층은 요양이 필요해질 때까지도 최대한 혼자 버티는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종종 외로움과 위험을 동반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 중심 노년 공동거주는 충분히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환경, 한식 중심의 공동 식사, 한인 교회·단체와 연계한 돌봄, 소규모부터 시작 가능한 구조 등은 이를 가능케 하는 요소이다.

이는 단순한 주거를 넘어, 이민자의 노년을 지켜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한인 노년 공동거주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바로 한인회, 향우회 등의 한인단체와 한인종교단체이다..

이 단체들이, 소규모 주거 프로젝트 발굴, 뜻이 맞는 노년층 연결, 행정·제도 정보 제공, 독일 복지 기관과의 중개 역할 등을 수행하면 한인 중심 노년 공동거주는 가능할 수 있다.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노년 주거 문제를 논의하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시작되고 있다. 대규모 시설이 아닌, 2~4명 규모의 소형 공동거주부터 시작하는 것도 현실적인 방법이다.

독일 한인사회는 지금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혼자 버티는 노년을 계속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할 것인가.

노년 공동거주는 거창한 제도가 아니다. 작은 집 한 채, 몇 명의 뜻이 맞는 사람, 그리고 함께 늙어가겠다는 결심에서 시작된다.

노년은 끝이 아니라, 서로 기대어 살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시작일 수 있다.

1439호 14면, 2025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