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훔 문학회에서 만난 제주 웹툰과 번역의 현장
제주 콘텐츠를 중심으로 한 교육•번역•문화 교류의 구체적 실험
지난 3월 20일 보훔 문학회(Literarische Gesellschaft Bochum)에서 열린 특별 행사는 한국 웹툰이 유럽 대학 교육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구체적인 현장을 보여주었다.
제주 콘텐츠 진흥원과의 2년간 협업으로 축적된 18편의 제주 웹툰 독일어 번역 성과가 처음으로 공개된 이 자리는, 단순한 문화 소개 행사가 아니었다. 번역을 교육 방법론으로, 지역 콘텐츠를 세계 문학의 자원으로 재정의하려는 진지한 실험이었다.
행사는 보훔 문학회 회장 랄프 글리차(Ralf Glitza) 박사의 환영사로 문이 열렸다. 마테이젠 명예영사는 건강상의 이유로 자리하지 못했으나 자유민주당(FDP) 관계자가 대독한 축사에서 한독 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보훔 시장 사샤 드밴더(Dr. Sascha Dewender) 박사 역시 웹툰과 번역이 오늘날 문화 교류에서 지니는 의미를 짚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한때 10대의 스마트폰 화면을 채우던 세로 스크롤 만화가 시장과 외교관의 축사를 받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날 보훔에서는, 그 사실이 딱히 놀랍지 않았다.
강연: 만화에서 웹툰까지
본격적인 프로그램의 포문은 「한국 문학사에서 만화의 의미 – 만화에서 웹툰까지」라는 제목의 강연이 열었다.
한국 문학의 큰 흐름 속에서 만화가 어떤 자리를 차지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짚으며 시작된 이 강연은, 만화를 단순한 오락으로 보는 시각에 조용히 반기를 들었다. 검열의 시대에도, 경제 성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국 만화는 사회를 풍자하고 당대의 정서를 담아내며 독자와 직접 호흡하는 매체로서 독자적인 문화적 지위를 쌓아 왔다는 것이다.
강연은 이어 디지털 환경과 함께 태어난 웹툰이 만화의 단순한 디지털 복사본이 아님을 짚었다. 세로 스크롤, 이미지와 텍스트의 긴밀한 결합, 회차별 연재와 독자 반응의 즉각적 피드백 — 이 모든 요소가 새로운 서사 문법을 만들어 냈다. 기술의 변화가 아니라 문학적 표현 방식 자체의 확장이라는 것이 이 강연의 핵심이었다. 이 논지는 이후 이어질 학생들의 번역 발표를 읽는 든든한 지적 토대가 되었다.
제주 콘텐츠 진흥원과의 2년, 그리고 여섯 학생의 증언
행사의 핵심 세션은 조교 율리아 (Julia)의 간략한 프로젝트 소개로 문을 열었다. 제주 콘텐츠 진흥원과의 협업으로 진행된 이 번역 프로젝트는 2024년 10편, 2025년 8편, 총 18편의 제주 웹툰을 독일어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장르는 일상, 판타지, 스릴러, 공포, 로맨스, 코미디까지 폭넓게 아울렀으며, 제주라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의 정서와 주제 자체를 형성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어 발표에 나선 여섯 명의 학생들은 저마다 번역 과정에서 맞닥뜨린 언어와 문화의 간극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다나(Dana)는 작가와 반려견의 일상을 다룬 「너와 추는 춤(Der Tanz mit dir)」을 소개했다. 핵심 과제는 개의 이름 번역이었다. 원래 이름 ‘냇길’을 음차하면 독일 독자에게 의미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Bakki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말풍선에서 화자가 불분명한 구조, 성별 표시가 없는 한국어의 특성도 번역 논의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라(Sarah)는 당뇨를 앓는 직장인 수봉이 제주로 이주해 새 삶을 찾는 「제주정착기」와 「영도정착기」를 맡았다. 그녀는 번역 과정에서 가장 자주 던진 질문이 이 한국어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독일 사람은 어떻게 말할 것인 가였다고 말했다. 이 짧은 술회는 번역의 본질을 꿰뚫는다. ‘개동’이라는 인물 이름은 개를 연상시키는 독일식 이름 Wuffi로 옮겼고, 수봉씨와 같은 호칭은 상황에 따라 Herr Kim 또는 이름 그대로 처리했다.
바네사(Vanessa)와 에니세(Enise)는 주인공 김순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이제라도 떠납니다」를 함께 발표했다. 텍스트가 적은 대신 표정과 몸짓으로 감정이 전달되는 이 작품에서 두 학생이 부딪힌 벽은 이중적이었다. 한국어에서 자주 생략되는 대명사가 독일어에서는 필수이기에 문맥을 통해 주어를 정확히 파악해야 했고, “우리 남편”에서처럼 한국어의 문화적 특성이 짙게 배인 표현을 어떻게 옮길 것인지도 거듭 토론해야 했다.
번역이 언어 변환이 아니라 문화적 해석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한 사례였다.
조세핀(Josefine)과 알렉스(Alex)는 작가의 프랑스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우울한 밀리의 방」을 소개했다. 속담, 의성어•의태어 등 직역이 불가능한 표현들을 독일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사 표현을 찾거나 일부 요소를 생략하는 선택이 불가피했다. 이들은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그 과정이 새로운 표현 방식을 발견하고 언어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경험이었다고 돌아봤다.
“이 한국어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독일 사람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물어야 했습니다.”
— 사라(Sarah)
교육 모델을 해부한 인터뷰 세션

랄프 글리차 교수의 진행으로 이어진 인터뷰 세션에서는 이 프로젝트를 이끌어 온 윤재원 박사, 조교 율리아, 수강생 사라가 질문에 답했다. 윤재원 박사는 제주 콘텐츠 진흥원과의 협력 배경, 수업 운영 방식, 웹툰 번역의 학문적 가치, 세계 문학에서 만화•웹툰의 위상 변화, 향후 번역 인력 수요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율리아는 조교로서 학생들의 번역 작업을 어떻게 지원했는지, 그 과정에서 스스로 무엇을 배웠는지를 나누었다. 사라는 같은 수업을 두 번이나 수강한 이유와, 두 번째 수강에서 달라진 웹툰 읽기 방식을 설명하며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이 인터뷰는 프로젝트가 단지 작품 몇 편을 번역하는 수업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설계된 교육 모델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역사소설과 한국 문학의 현재 — 이종원 연구원과 졸리나의 통찰
마지막 세션은 웹툰을 넘어 한국 문학의 역사적 맥락으로 시야를 넓혔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현재 루르-보훔대학교 방문연구원으로 체류 중인 이종원 연구원이 한국 역사소설의 변천을 짚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소설이 이순신•세종대왕과 같은 영웅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면, 해방과 분단 이후에는 서사의 중심이 영웅에서 농민•노동자 같은 민중으로, 단선적 서사에서 복합적•비판적 서사로 이동했다고 분석했다. 나아가 최근의 역사소설은 사건 중심을 벗어나 기억과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비선형 구조를 취하며, 역사의 단일한 해석보다 복수의 해석 가능성을 탐구한다고 진단했다.
본 대학교 석사과정의 졸리나(Jolina)는 독일 독자의 시각에서 한국 문학의 매력을 풀어냈다. 그녀는 입문 추천 작품과 작가, 한강 작품의 수용 방식, 한국 문학이 독자와 관계 맺는 방식의 독특함, 젊은 독자에게 한국 문학을 권하는 이유를 차례로 이야기하며, 한국 문학이 서구 문학 담론 안에서 이미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해 가고 있음을 증언했다.
포스터 전시 — 2년의 협력이 벽을 채우다
휴식 시간에도 행사는 멈추지 않았다. 2년간 번역된 18편의 웹툰이 포스터 형태로 전시되어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행사장 벽면을 채운 포스터들은 이 프로젝트가 일회성 수업 활동이 아니라 축적된 장기 협력의 결과임을 시각적으로 증명했다. 제주 콘텐츠 진흥원이 제공한 기념품도 배포되어, 참가자들이 제주라는 공간을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는 텍스트로만 전달되지 않는다. 손에 쥐고 바라보는 작은 경험도 기억이 된다.
무엇이 이 실험을 의미 있게 만드는가
이번 행사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한국 웹툰이 독일 대학의 번역 교육 안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콘텐츠의 위상 변화다. 웹툰은 오랫동안 ‘보는 만화’로 치부되었지만, 이미지•장면 연출•리듬•시각적 공백을 통해 전통적 텍스트 문학이 쉽게 구현하지 못하는 복합적 의미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학생들의 발표가 보여준 번역의 어려움은 역설적으로 웹툰이 얼마나 정교한 문화적 텍스트인지를 입증했다. 둘째, 제주 콘텐츠 진흥원의 전략적 역할이다. 지역 콘텐츠 기관이 해외 대학 교육 프로그램과 직접 연계하는 것은 드문 사례다. 제주의 이야기가 보훔대의 강의실에서 번역되고 전시되는 이 구조는, 기획-번역-교육-확산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모델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학습자에서 번역자•연구자로의 성장이다. 다나, 사라, 바네사, 에니세, 조세핀, 알렉스의 발표는 단순한 수업 결과 보고가 아니었다. 그들은 문화 번역자로서 한국 사회의 언어적 논리와 독일 독자의 문화적 기대 사이에서 실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 경험은 어떤 문법 교육보다 깊은 언어 인식을 남긴다.
넷째, 청중의 반응이 확인해 준 수요다. 질의응답 시간에 쏟아진 질문들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적극적인 독자적 관심으로 이어졌다. 한국 콘텐츠가 독일 사회 안에서 이미 일정한 관심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으며, 적절한 연결이 이루어진다면 더 넓은 문화적 접점이 가능하다는 신호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강연장의 공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제주에서 태어난 이야기들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낭독되고, 전시되고, 토론되었다. 2년의 협력이 한 저녁 안에 고스란히 담겼고, 자리를 채운 청중은 그것을 충분히 알아보았다. 번역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1454호 14면, 2026년 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