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스위스에서 나의 첫 외국 생활과 기억들

문정균(재독한인간호협회 고문)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었던 1972년 봄바람이 살랑 마음까지 설레이는 4월, 산부인과 분만실에서 조금만 있으면 분만 할 것 같은 데 시간을 자꾸 끌면서 애타게 기다리는 산모의 남편 모습과 한 생명이 태여 날것을 대기 해 나와 의사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통과 아픔을 안고 기쁨으로 아기를 분만한 산모를 보고 여자는 엄마가 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혼자서 “나는 애기를 안 날것이야”라고 다짐했다.

집에 돌아오니 해외 개발공사에서 편지가 왔다. 그 내용 즉 8월초에 스위스 베른에 가게 되었다고.

김포공항 친구들의 배웅(1972년 8월)

어찌된 영문인가 ? 나는 독일에 가고 싶었는데. 스위스는 1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요들 송, 정밀기계 공업이 발달된 나라라고 만 알고 있었고 또 어느 언어를 쓰는지 ?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었다.

중학교 지리시간 때 독일에 대해 발표할 계기가 있어 직접 독일 대사관에 가서 라인강의 기적, 어떻게 발달 되었으며 등을 알아보고 독일 포스터를 준비한 기억이 났다. 그래서 다른 나라보다는 조금 더 많이 알게 되었고 흥미도 많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선택 과목 중 제2 외국어가 독일어였다. 내가 알기에는 그 당시 70,80년대 까지는 고등학교에서 대부분 제2외국어 선택 과목이 독일어, 불어였었다.

몇 개월 후 알았지만 스위스는 독어, 불어, 이태리어, 레트로로메니쉬 등, 거의 4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알프스의 산맥 최고봉인 융후라우욕(Jungfraujoch)이라는 거 등, 모든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내가 다니고 있던 경희의료원에서는 처음 스위스로 가게 되었다고 동료들과 의사들이 모두들 반가워하고 간호과장은 정말로 축하 한다면서 자기일 같이 좋아 하셨다

드디어 7월 마지막 주, 기다리고 기다리던 스위스행 고등학교 동창들과 간호대학 동창들이 공항에 나와 정성스럽게 싼 선물과 배고플 때 먹으라고 싸준 김밥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엄마, 언니들은 이제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른다면 눈물을 흘렸다.

KLM(네덜란드) 비행기를 탔다. 처음 비행기를 타는 순간 나는 너무 행복 했었고 열심히 일하면서 공부도 더 하고 세계여행도 하며 훌륭하게 잘 살아 볼 것이라 다짐하였다.

내린 곳은 Köln 공항이었다. 그곳에서 스위스로 가는 버스가 우리 33명(간호사 11명, 간호보조사 22명)을 기다리고 있었고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지금부터 한국어는 우리 33명이나 통하였고 영어로 (독일어)말을 해야 했다.

오기 전 3개월 독일어를 배웠지만 그 당시 갓난아이 처음 말 배우듯이 너무나 부족했고 강의시간은 오전에 2-4 시간 정도였다. 그렇지만 젊고 용기와 열정이 있기 때문에 부픈 마음으로 많은 기대를 갖고 눈들은 모두 초롱초롱 빛났다.

중간에 점심식사를 한다고 고속도로(Autobahn)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포크와 칼로 음식 먹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능숙하지 않은 서양음식을 처음 대해 봤다.

몇 시간의 자동차길을 달리며 아름답고 푸른 꿈과 그림 속에서만 상상하고 동경했던 풍경을 실지로 만끽하며 스위스 베른 대학 인젤스피탈(Inselspital )병원에 도착하였다. 한국 간호사로는 우리가 처음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환영인사와 아울러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기숙사를 배정 받았다. 몇 명이 나하고 같은 건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마침 독일에서 간호사 공부를 하였고 한국에 갔다 잊을 수 없어 스위스로 우리와 함께 온 분이 대표로 감사하다는 말과 많은 도움을 바란다고 독일어로 하였다. 너무나 부러웠다. 언제쯤 되면 저렇게 독일어를 할 수 있을까?

기숙사주변은 아름다운 숲 속에 파 묻혀 있었고 병원 건물도 다 그 주위에 있어 환자들이 산책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꽃동산 같았다. 정말 내가 이곳에 왔다. 꿈을 꾸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생활을 하며 마음의 여유와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스위스 간호사가 일주일 동안 이곳 병원구조와 장소, 임상 간호 등 “우리가 무엇을 , 왜, 어떻게 하는 방법 (Anleiten)”등 안내를 자세히 해 주었다.

그런 다음 나는 남자 안과 병동에 배치되었다. 안과에는 주로 나이 드신 결혼하지 않는 디아코닌(Diakonin) 간호사들이었고 그들은 매우 봉건적이며 무뚝뚝한 재미없는 무보수로 일하시는 분들이라 환자들에게나 우리에게도 친절하지 못했다.

졸업하자마자 몇 개월 후 이곳에 오니 임상경험도 거의 없었고 독일어도 못하다 보니 눈 수술로 안정을 취해야 하는 젊은 남자들의 눈, 손, 발이 되어 자기 몸을 관리 할 수 없는 분들 몸을 닦아주는 일과 침상 만들고 음식을 먹여 주는 일이었다.

눈 수술한 젊은 남자들을 정성 것 간호하고 친절하다 보니 감사한 마음으로 어느 환자는 내게 ‘Kuss’를 해주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Kuss’가 무슨 뜻인지 몰라 디아코닌 간호사에게 물어 보았더니 대답은커녕 다음 날 아이들 병동으로 보내 주었다.

아이들 병동에도 디아코닌 간호사가 거의 다였다. 그들은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주로 우리에게 이것 해라 하며 일을 시켜먹었다. 그들은 “봉사로 일을 하기 때문에 봉급도 없다” 하면서 투덜투덜 하였다. 내가 생각해도 그러면 왜 디아코닌이 되어 생활하는지 알다 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 병동에서 일을 하니 스위스 독일어도 배울 수 있었다. 스위스는 스위스/독일어가 있어 표준 독일어는 배울 수 없었다. 베른 대학 병원에서 일주일에 3 시간씩 독일어 시간을 주었다. 그때는 독일 교사가 와 표준 독일어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쓰는 언어는 사투리와 다른 언어만 들을 수 있었다. 3 개월 동안 베른 대학병원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준 일이었다.

하루는 스위스 간호원장이 우리 한국인에게 여행사를 통해 스위스 전체를 여행하는 배려를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 전체 스위스 여행비용은 우리에게 큰 비용이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취소를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유감스럽고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이 된다. 5년 동안 살면서 전체 구경은 못했고 몇 군데만 그때그때 관광으로 다녔다.

일주일 동안 스위스 가정에서 문화와 언어를 배우며 생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 집은 조그마한 공장을 운영하며 두 아이들(4세 ,6세)이 있었다. 남편은 항상 바쁘게 사업에 열중하며 생활에 임하여 그 곳에 있으면서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 곳에 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점심식사였다. 메뉴로 Suppe와 Salad를 먹고 나면 정식은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배가 꽉 차였다. 그래서 후식은 손도 못 댈 정도였다. 그 당시는 ‘Nein’ 소리도 못하며 정성스럽게 나를 위해 해준 고마움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 뿐이었다.

스위스에 온지 몇 개월뿐이어서 부인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영어로 약간의 대화와 독일어를 배우며 나대로 “독일어를 빠르게 익숙해져야 되겠다” 하며 내 손에는 독일어 사전이 꼭 붙어 다녔다.

그 당시의 근무시간은 아침 7:00-12:30, 점심 휴식시간(12:30-15:30), 오후 15:30-19:30 하루에 9시간으로 일주일에 45시간 일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 종일 병원에서 잠자는 시간 빼고 일 한 것이었다.

저녁시간은 일주일에 두 번씩 언어 학원을 나가 독일어를 익혔다. 스위스 자체 내에서 표준 독일어를 듣고 배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스위스 연방국가에서 쓰는 말이 주마다 다르고, 독일어라고 하면 스위스 독일어가 있어 외국인에게는 많은 언어의 장벽이 있다.

스위스 간호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좋은 직업이고 봉급도 많았고 의사와 마찬가지로 책임감도 많고 국제적으로 간호사 자격을 인정해 나도 스위스 간호사 자격증을 갖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5년 동안의 나의 스위스 간호사 생활은 다람쥐 체 바퀴 돌듯 즐거웠으면서도 기회를 많이 이용하지 못하였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1467호 14면, 2026년 7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