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간호사 서독 취업을 이끈 이종수 교수 별세

한국간호사들의 서독 진출을 이끈 이종수교수가 지난 1월 9일 별세하였다. 향년 94세.

이종수교수는 간질환 전문박사로 1929년 전남 영암에서 빈농의 6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7년 대전사범학교를 좁업한 뒤 1958년 장학재단의 후원으로 독일에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유학 1년만인 1959년 간염에 걸려 간과의 인연을 쌓았다. 1962년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1964년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1975년엔 동양인 최초로 종신 교수직에 올랐다.

이 교수가 간호사 파독을 생각하게 된 것은 1959년말 독일 뒤셀도르프 병원에 간염으로 입원, 의사와 간호사 등 독일 의료진의 모습을 보고서부터다. 선진적인 의료기법과 최선을 다하는 태도에 대해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는 한국농어촌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문제는 의료봉사 인력의 확보였다. 농어촌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선 양질의 의료 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위해 한국의 간호학생을 독일 병원으로 데려와 훈련시키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감리교 신자였던 이 박사는 뒤셀도르프대학 목사의 도움으로 프랑크푸르트 주재 미국감리교선교본부측과 접촉했다. 처음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의 감리교병원인 베티니언병원의 병원장을 만났다.

긍정적인 답변이었지만, 조건은 상당히 열악했다. 즉, 월급은 20마르크에 불과했으며, 여비도 한국감리교회측이 부담하고 심지어 독일 수녀복을 물려 입는다는 조건까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박사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물꼬를 트기 위해서 한국감리교회를 통해 간호학생 2명을 독일로 데려왔다. 이종수 박사에 의한 첫 간호학생 파독이었다. 이때가 1960년의 일이다.

간호학생은 독일에서 보통 1년간 예비훈련생으로서 적응훈련을 한 뒤 3년간 병원실습과 견습생활을 한다. 야간 근무는 없고, 4년 과정을 마치면 간호사가 된다. 보통 예비훈련생 때에는 세면대와 침대시트 교체, 식사 준비와 설거지, 세탁물의 분류 배치, 오물 수거와 병실청소, 침구정리 등 잡일을 주로 한다.

1년간의 예비훈련생 과정이 끝나면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전염병동 등 5개 병동 돌아가며 한 학기에 한 병동씩 간호사 밑에서 견습했다. 주로 처방전 처리와 투약, 주사, 신생아 돌보기, 환자의 체온과 맥박, 혈압측정 등. 한국에서 온 간호학생 2명은 어린 나이에 언어문제와 향수 등을 극복하며 열심히 근무하고,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곧 좋은 평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인 간호사 파독시대의 개막을 예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1964년초 독일 Essen시에 있는 루터교병원 Huyssens-Stiftung이 감리교병원으로부터 “한국간호학생교육에 만족한 경험을 했다” 는 소식이 이종수교수에게 전달되었다. 이 병원의 간호학교교장 Sommer여사가 자기 병원 간호학교에서 한국인 간호학생교육을 실시하고 싶은데 이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독일연방경제협력부(당시 후진국원조부)에 신청하겠다고 이교수에게 제안, 1964년 가을에 14명의 간호학교학생이 독일정부의 후원으로 독일에 오게되었다.

이종수 교수는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1963년부터 1964, 1965, 1967, 1968년 매년 20명씩, 100명의 간호학생 파독을 주선했다. 간호학생의 파독이 계속되면서 근무 여건도 차츰 좋아졌다. 기숙사에 보통 2명이 한 방을 사용했고, 침식과 세금을 빼고 100-300마르크 정도를 올라갔다.

하지만 한국농어촌 의료봉사인력을 배출하겠다는 이 박사의 구상은 차츰 어긋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언어장벽 극복 등 현지 적응에 실패했고, 현지생활에 적응한 상당수 간호학생들조차 간호학생보다는 봉급이 많은 간호보조원으로 전환해서 일했기 때문이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간 기본임금과 결혼수당, 자녀수당 등에서 큰 차이가 없어, 굳이 4년의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종수 박사는 간호학생보다 간호사 파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감리교선교회 등과 한국 보건사회부 등에 간호사 채용과 파독을 제의했다.

이종수교수는 1965년 봄 독일루터교병원협회 대표자들과 노동계약 (노동시간, 언어교육, 3년의 계약기간보장, 독일연방고용인 봉급규정에 의한 봉급지급 등)에 관하여 협상을 시작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교수는 한국의 보건사회부에 이 곳에서 협상한 노동계약을 제시하며 200명의 졸업간호사를 부탁했다.

이후 이종수교수는 한국 보건사회부 및 독일 루터교병원협회와 3가지 합의사항을 이끌어 내며 한국 간호사의 서독 파견이 가시화되었다. 한국에서는 오로지 한국보건사회부가 한국해외개발공사와 공동으로 간호요원의 모집, 여권수속, 출국수속 등을 담당하고 한국해외개발 공사는 선발된 간호요원의 명단을 이종수교수와 독일 병원에게 보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경비는 한국해외개발공사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독일에서는 독일루터교 병원협회의 대표자로 당시 라인지방 루터교 병원협회장 Esser (Bad Kreuznach)씨가 선발되어 독일에 오게 될 간호사들의 노동허가 거주허가 및 기타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한국간호사가 근무할 해당 병원과 독일루터교 사회사업본부와 협력하여 해결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이종수교수는 1966년 4월 독일 루터교 병원협회대표 Esser회장과 한국을 방문, 한국보건사회부와 합의사항에 관하여 정의섭 보사부장관, 한상태 의정국장 그리고 한국개발공사 사장과 계약체결을 했다.

동시에 200명 졸업간호사의 여권수속, 독일병원 배치 그리고 사증신청 등이 이뤄졌다. 1966년 6월 제1차 졸업간호사가 Köln/Bonn공항에 도착했다.

이 후 이종수교수에 의해 독일로 온 한국간호사들은 1967년 200명과 600명의 간호보조사

1968년 200명의 간호보조사 등 1968년 3월까지 간호학생, 간호사, 간호조무사 등 1200여명을 파독시켰다.

이렇기에 한국 간호사들의 서독진출을 이끈 이종수교수의 별세소식은 동일 한인사회의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고(故)이종수교수님의 명복을 빌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바이다.

다음은 파독간호사 50주년을 맞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고인의 육성이다.

“만학도인 나에게 대학병원에서 환자, 연구와 교육을 위해 헌신을 할 수 있는 기회와 현재의 고령에도 일할 수 있는 건강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결실 있는 57년을 독일에서 의사로서 또한 의학자로서 보낼 수 있어 감사드린다.

특히, 저와의 인연으로 독일에 오신 한국간호요원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시기를 기도한다.

2016년 3월 3일 본대학교 의과대학교수 이 종 수“

1347호 14면, 2024년 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