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학자 클레베 한인회장 장례식

봄 볕 같은 따스함을 남기고 간 ‘기부 천사‘

고흐. 동포사회에서 기부 천사로 알려질 만큼 일생을 봉사와 기부로 살아온 박학자 회장의 장례식이 Goch Stadtfriedhof Kapelle에서 1월16일 오전 11시부터 진행되었다.

독일 전 지역에서 장례식에 참석한 각 단체장들과 지인들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하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생전의 고인을 기억했다.

1월 15일 저녁에 열렸던 장례 미사에도 함께했던 일부 동포들은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고인을 생각하며 먹먹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민요 ‘아리랑‘이 피아노로 연주 되는 가운데 장례를 집전하는 독일 신부님은 박학자 회장의 약력을 소개하며 1971년에 독일에 온 이후 남편 Dr. Schemuth와 가정을 이루고 해미와 안나 두 딸을 두었고 평생을 양로원, 유치원, 학교 등 각 단체를 찾아다니며 한국의 전통 문화를 소개하고 한국 문화의 전도사로 앞장서 왔음을 소개했다.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한 채로 양로원에서 ‘삼고무‘를 추며 한국 문화를 소개했던 박학자 회장의 열정과 투혼은 아직도 불가사의로 알려져 있다.

박동근 전 클레베 회장은 재독한인총연합회 총회에 참석했을 당시 일화를 소개하며, 간호사 안건으로 이런 저런 의견이 나오자 “간호사로 독일에 왔으면 간호사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중요하지, 무슨 다른 일들로 이렇게 까지 다툼이 있어야 하느냐“면서 일침을 놓은 일이 있다며 고인의 생전 철학을 밝히기도 했다.

장례 예배가 끝나자 다시 아리랑이 연주되는 가운데 운구는 묘지로 이동하였고, 마지막 하관에 앞서 집례자는 짧은 설교를 통해 이 땅의 나그네로 살다가 결국에는 창조주 하느님께 돌아가서 편히 쉬기를 기도했다.

다 함께 주기도문으로 마감한 후 가족을 시작으로 장미꽃을 관 위에 바치며 고통 없는 천국에서 편히 쉬기를 기도하였다.

소천 당일과 장례식까지 두 차례나 고인을 찾아 온 허승재 본 분관장을 비롯해 유제헌 유럽한인총연합회 회장, 박선유 재독한인총연합회 고문, 각 단체장들은 그 동안 고인이 동포사회에 미친 영향들이 얼마나 컸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16년 전 동포사회에서 처음 창단된 재독코레안심포니오케스트라 활성화를 위해 한인 2세와 유학생들을 위해 뿌린 박학자 회장의 헌신과 사랑은 음악인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정도로 당시에는 센세이션한 일이었다.

창단될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용선 단장과 함께 독일 내 베를린, 본, 프랑크푸르트 등 11개 도시와 암스텔담, 뉴욕, 서울, 고양, 부산, 광주, 대전 등 순회공연을 하며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 같은 일들을 해내었다.

이런 희생과 봉사는 지난 해 국민 포장 수상으로 박학자 회장의 그 동안의 노력이 높이 평가되었다.

늘 나보다 남이 먼저였던 고인의 생활 철학은 동포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고, 동포사회 발전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essennnc@hanmail.net 나남철


고 박학자 회장님께 드립니다.

하얀 식탁 위에 핑크빛 튤립이 화사하게 웃고 있는 밤 입니다.

유난히 하얀 피부에 분홍빛 옷이 잘 어울렸던 분. 튤립꽃을 볼 때 마다 회장님의 화사한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립니다.

회장님과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온 시간들… 20년 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반쪽이 되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갔습니다. 든든히 곁을 지켜주어 고맙다고 늘 감사해 하시던 회장님의 그늘은 제겐 큰 위로와 평화의 안식처였습니다.

가족들에게는 냉정할 만큼 물질을 아끼셨지만 동포사회 단체들이 손을 내밀면 언제나 환한 미소로 손을 잡아주시던 따뜻한 분 이셨습니다.

막내딸 안나가 커다란 첼로를 등에 매고 빗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몇 번이나 넘어져도 그 흔한 중고차 한 대도 사주지 않는 냉철함을 잃지 않았지만, 회장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에게는 단 한 번도 거절을 하지 않으시는 통 큰 여장부였습니다.

집안 부엌과 거실을 한인회원들 코로나 접종을 위해 통째로 내어놓으신 따뜻한 마음. 한국인이라면 자신의 집까지 제공하며 서둘러 예방접종을 해주신 Herr Schemuth, 이런 당신들이 있어 우리는 오늘도 웃을 수 있었습니다.

배가 불뚝 나온 아주 오래된 TV를 보면서도 하나도 불편해 하시지 않으셨던 검소함을 몸소 보여주신 박학자 회장님!

손끝에서 아름답게 피어났던 예술 작품들. 사과로 학을 오려내고 종이로 날아가는 새도 만드셨던 여문 손끝에서 나오는 작품들은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이 저절로 쏟아져 나오게 하는 예술가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해 12월 중순, 2024년도 한인회 행사를 계획하며 얼마나 설레셨는지 전화 목소리에는 늘 활기찬 기운이 넘쳐났습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우리는 꼭 만날 거라며 다시 만날 날을 약속했는데, 왜 이리 먼 길을 떠나셔야 했나요.

그 동안 함께 계획한 약속들 하나도 지키지 못했는데 무엇이 그리 바빠 이 추운 겨울에 가셔야 했는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전화를 하실 때 마다,늘 그러셨지요. “우리 이렇게 서로 돕고 늘 의지하며 마지막까지 함께 하자고…” 그 짧은 말씀은 제겐 큰 힘이 되었고 세상을 헤쳐 나갈 든든한 지원군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족한 제가 도움이 되었으면 얼마나 되었다고 언젠가 회장님이 주신 편지 봉투 겉봉에 쓰신 ‘저를 위해 늘 수고해 주시고, 제 곁을 늘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글을 읽고 울컥했습니다.

나보다 늘 남이 먼저였던 회장님! 내 아픔보다 남의 아픔을 더 가슴 아파하시던 따뜻한 분!

당신이 있어 저는 늘 행복했습니다.

이제 그 환한 미소로 저희들을 내려다보시며 언제나 응원해 주세요.

아픔이 없는 그곳에서 분홍빛 화사한 미소를 저희들에게 늘 보내주실 줄 믿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나남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