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도자기(2)
식생활 도구의 한 범주 속에서 흔히 ‘그릇’이라 불렸던 도자기는 거기에 인간의 예술적 혼이 더해져 예술과 문화로 꽃피우게 된다.
한 민족의 정신과 사회적인 정서는 흙이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되기 때문에 한 나라의 예술성과 감수성, 세련미를 알아보려면 그 나라에서 구워 낸 도자기를 척도로 짐작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도기와 자기의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도자기라는 용어로 통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는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도기를 뜻하는 ‘Keramik’과 자기를 뜻하는 ‘Porzellan’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고 혼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문화사업단에서는 먼저 도자기에 대한 일반을 살펴보고, 이후 유럽의 대표적 도자기인 마이센도자기, 본 차이나의 웨지우드, 네덜란드의 델프트 도자기,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그리고 독일의 빌렌로이 보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유럽 최초 자기의 탄생, 마이센 자기(Meißner Porzellan)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유럽의 후기 바로크, 로코코 양식의 미술에 가미된 중국풍의 미술품을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 말한다. 16세기말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새항로를 개척, 본격적으로 인도와 중국,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하며 많은 향신료와 실크, 차와 도자기 등 많은 물량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다.
특히 도자기는 그중에서 가장 값비싸고 인기가 많았고 유럽의 왕후, 귀족들이 다투어 수집하였다. 처음에는 수집대상에 미쳤으나,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이러한 동양의 공예풍과 그 모방품을 실내장식에 활용된다.
당시 40년간 (1694/1733) 폴란드의 왕을 겸하기도 했던 독일 작센의 선제후 아우구스투스 2세, 사치라면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였고, 수도인 드레스덴을 동유럽의 파리로 만들만큼 문화적 예술적 교양이 뛰어났던 그는 당시 ‘백색의 금’과도 같았던 동양 도자기의 마니아였다. 중국, 일본에서 온 5만여점에 이르는 그의 자기 수집은 지금도 드레스덴 츠빙어궁전(Zwinger)의 포쩰란박물관에 중국의 비단을 입힌 벽과 중국식 옻칠 가구들과 함께 색과 그룹별로 전시되어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특히 1945년 연합군의 융단폭격으로 시의 90%가 파괴됐다는 드레스덴에서 그의 수집품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보전되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경이로울 따름이다.
강건왕(August der Starke)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도자기 마니아, 작센의 제후 아우수스트의 주도아래 유럽 최초의 자기 개발이라는 역사적 쾌거를 이뤄냈는데 이것이 마이센 자기(Meißner Porzellan)이다.
아우구스트 제후는 바닥난 금고를 채울 욕심으로 1682년 프로이센 슐라이츠(Schleiz)태어나고 베를린에서 소위 약학/화학 견습공이었던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를 가두고 황금을 만들도록 했다. 은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연금술사로 소문난 뵈트거는 프로이센와 왕 프리드리히 1세가 현상금을 걸고 찾아다니자, 작센으로 도망을 친다. 이 소식을 듣고 작센의 왕 아우구스트는 Wittenberg에서 의학을 더 공부하고자 했던 뵈트거를 잡아다가 연금 상태에서 금을 만들도록 요구한다.
거듭된 실패로 화학 조합만으로는 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아우구스투스 2세는 이미 자기제조 비법을 연구하고 있는 취른하우스(Ehrenfried Walther von Tschirnhaus)에게 그에 대한 밀착감시와 함께 자기를 개발하도록 명령하였다. 연구 결과의 외부 유출을 두려워한 왕은 1705년부터 취른하우스를 총괄자로 하고, 마이센(Meißen)에 있는 알브레히트성 (Abrechtsburg)으로 이전하여 이 연구를 계속하게 한다. 많은 돈을 지불하고 계속되는 연구 결과, 1708년 1월 15일 소성일지에 따르면, 12시간의 소성시간 이후 오후 5시 백색의 반투명 작은 접시 모양 시편이 가마에서 나왔는데, 이것이 최초 유럽 자기의 탄생이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이 소성일지의 글체는 뵈트거의 필체가 아니라 뵈트거의 작업장 동료와 취른하우스의 필적이었다.
하지만 취른하우스는 아깝게도 1708년 10월 사망하여, 몇 달 후에 개장할 마이센 자기 제작소를 눈에 보지 못하였다. 취른하우스의 죽음 이후, 뵈트거가 다시 연구를 계속하여 1709년 3월 28일 29세의 뵈트거는 자기온도에 맞는 유약을 개발하여 마이센 자기를 완성시켜 유럽 최초 자기의 발명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왕은 1710년 1월에 드디어 유럽의 최초 자기생산을 공포하고 6월에 마이센 알브레히트 성에 왕립 자기공방을 설립한다.
1714년 4월 긴 유폐생활에서 벗어나 행정관의 이름으로 자유의 몸이 된 뵈팅어는 1719년 3월 13일 드레스덴에서 37세의 나이로 독극물질을 다루는 실험을 하다가 그로 인해 짧은 인생을 마친다.
뵈트거를 잃은 후 훼롤트(Gregorius Höroldt)와 켄들러(Johann Joachim Kändler)에 의해 마이센 자기는 예술품으로 가치를 높인다. 훼롤트는 금속산화물을 이용한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여 도자 채색의 극치를 보여주었고, 1731년부터 궁중의 조각가 캔들러가 참여하게 되면서 그때까지 그릇의 형태에 머물렀던 마이센 자기를 입체적인 예술품의 경지로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순간의 동작을 포착하는 바로크풍을 자기에 표현하였고, 당시 러시아 여왕, 아우구스트 3세 등의 영웅적인 기수상 등의 큰 조형물도 제작하여 예술사조와 시대를 반영했다는 평을 들었다.
이들은 초반에는 철저하게 중국의 경덕진 자기와 일본의 이마리 도자기 디자인을 모방했지만 점차 당시 유행한 문양과 형태를 가지고 마이센 특유의 개성을 자기에 담으며 18세기 중엽까지 독보적 전성기를 누렸다. 이 황금알을 낳는 독점 자기산업도 얼마가지 못해, 오스트리아 빈에 2명의 도자기술자들을 빼내와 자기를 생산하게 되고, 약 반세기 만에 유럽전역으로 자기 제작 기법이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자본력이 탄탄한 국가의 지원을 받은 공방들이 점점 시장을 지배하고 인기를 차지하게 된다.
마이센 도자의 심벌은 작센주의 상징인 푸른 쌍검이며, 1981년부터 지금까지 공식이름은 국립 자기제작소 마이센(Staatliche Porzellan-Manufaktur Meissen)이다,
1350호 23면, 2024년 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