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시인 시 낭독회,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시적 순간

박소진 시인

시적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이 순간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공평하다. 우리를 둘러싼 모양은 다르지만, 이것이 다다르는 미래는 ‘삶’이라는 공통의 이름을 갖는다. 우리 앞에 던져져 있는 작은 것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 이 세계를 찾아내는 사람이 없어도, 언제나 우리 앞에 있고, 또 늘 뒤에서 기다려 주는 삶의 틈새, 나는 이를 시적 순간이라 부르기로 한다.

김소연 시인을 만나러 가는 날은 사방이 여름이었다. 곳곳은 주황빛 오렌지 알맹이가 튀어 반짝였고, 연둣빛 잎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여유로웠다. 유럽의 여름은 태양 옆에서 녹지 않고 견디어 피는 오렌지다. 공기는 선명한 주황빛을 뿜으며 주변을 물들이고, 이 빛은 허공에서 들끓다가 공중에서 뜨겁게 터져 버린다. 두터운 층의 주황색 아지랑이와 자유로운 연둣빛 녹음이 만드는 언덕 사이를 일렁이기 시작하는 여름, 시(時)를 만났다.

6월 한 달, 뮌헨에 머물고 있는 시인이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다. <교포신문>에서 문학의 장을 열어 주었다. 김소연 시인의 시 낭독회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시적인 순간>이 열렸다. 시인은 읊고, 같은 공간에서 우리들은 귀를 모두 연다. 시인은 시집 『수학자의 아침』(문학과 지성사, 2013), 『촉진하는 밤』(문학과 지성사, 2023)에서 일곱 편을 낭독했다. <강과 나>, <수학자의 아침>, <미래가 쏟아진다면>, <다행한 일들>, <푸른 얼음>, <꽃을 두고 오기>, 그리고 <촉진하는 밤>. 김소연 시인의 육성 낭독이 끝나면, 소프라노이자 연극배우인 Alexa Hurka가 독일어로 번역된 시((번역: Marla Koch, Sool Park, Lisa Wagner)를 독일어로 낭독했다. 나는 사회를 맡았다.

시인은 비가 와 꺼내 입은 카디건 주머니에서 손톱만 한 조개껍질 조각을 발견한다. 여행을 떠나려 탄 기차 밖 창가로 아이들이 달려왔던 날의 공기를 다시 마신다. 콧물과 웃음을 삼킨 어린이의 눈빛에 손을 흔들었던 기억을 복기한다. 또 어떤 날은 쌓인 이삿짐 사이의 주름 사이에서, 누군가를 간호하다 마음이 달려야 했던, 촉진하는 밤*에 시를 썼다.

낭독회 동안 시인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오는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시인은 처음, 우리를 저 멀리서 부르며 시작했으나 메아리처럼 우리 주변을 돌며 공명하다가 어느새 가까이에 와 귓속말한다. 낭독회에 모인 우리들이 가까워졌고, 우리 사이의 공기로 서로의 벽을 허물었다.

……(중략)……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만

불행히도 꿈은 아니라서 마중을 나온 채

그 자리에서 어른이 되어간다

마침내 무엇을 기다리는지 잊은 채로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들어주는

새까만 아이였던 마음으로

지금 나는 지나가는 기차가 되고 싶다

……(후략)……

김소연, <미래가 쏟아진다면>중에서,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 지성사, 2014, p.102

시적 순간은 일상의 벌어진 틈 속에 있다. 힘겹고, 지난하고, 서글프고 기쁜 우리들의 감정이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이다. 어떤 것을 집중하고 있을 때도, 또 무엇으로부터 해방 혹은 안도감을 느낄 때도 시적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사물이든, 행위든, 사람이든, 나의 열망이 영원한 하나에 닿을 때의 환희. 이럴 때 우리는 일상의 벌어진 틈을 보게 되고 틈과 틈의 경계에 현현하는 오로라를 만난다.

경계는 꼭꼭 숨어 있기 때문에 깊고 어둡지만, 한번 시적 순간을 만나게 되면 그 이후의 일상은 몹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시적 순간이라는 말 앞에 이런 말을 붙이고는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것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의 동음이의어.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독일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삶은 각자의 인생을 관통하면서 삶의 근육을 다져 준다. ‘디아스포라’라는 꾸밈 말의 경계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날마다 열심히 살고 있는가? 그러나 동굴의 막장 같은 어둠 속에서 부딪히고, 깨지고, 실패하고, 배우면서 우리는 더욱 튼튼해진다. 우리의 삶이 단단해지는 동안 작은 힘이 작용한다. 삶에서 깨치고 배우는 것들은 틈 속에서 탄생한다.

우리 각자의 삶의 장면 중 어떤 것이 그러한가? 7년 전, 독일에서의 첫 여름을 복기한다. 맨발로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았다. 수영복만 입고 자전거를 타는 벌게진 얼굴들도 친근하다. 이제는 발 밑에서 갈색 모래가 섞여 올라오는 호수에서의 수영이 꼭 바다에 온 것 같이 깨끗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얼음 대신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올려주는 텁텁한 아이스 커피도 익숙하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대상과 친해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서로의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틈’의 경계를 여행하자. 일상의 순간이 낯설게 느껴질 때, 그때가 시적 순간이다.

시인들은 아주 작은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데 익숙하다. 작은 돌멩이가 발밑에 있다면 가까이 가서 말을 걸어 보자. 그리운 것이 있다면 그리운 것의 또 다른 그림자를 찾자. 그러면 시인처럼 비가 온 날 꺼내 입은 카디건에서 각자의 조개껍데기가 나올지도. 그때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된다.

김소연 시인의 낭독회가 끝난 시간은 저녁이 찾아왔는데도 한낮이었다. 밤과 낮이 교차하고 그 경계의 틈 속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삶을 촉진하며 달려간다. 하늘에서 주황빛 오렌지 과즙이 열렬히 터진다. 공간을 채운 것은 우리들. 한 알, 한 알 속에 태양처럼 들끓는 것들이 가득 차 있다.

이 물질들이 움직이며 우리 각자의 삶에 이야기가 가득 찬 열매를 맺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충분히 시(時), 당신의 시적 순간은 지금, 바로 가까이에. 여름 사이로 시가 쏟아진다.

……(중략)……

더 멀리까지 가서

조금만 더 힘을 내어 가서

이 꽃다발을

두고 오기

꽃다발을 꽃다발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둡니다

이렇게 오래 걸려 찾아왔는데

콧물이 코끝에서 얼고 있는데

그런 곳에도

매일 아침 출근을 하는 가이드가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이 묘비를 찾아오고 있다 하네요

김소연, <꽃을 두고 오기>중에서, 2023, 『촉진하는 밤』, 문학과 지성사, p.85

1369호 16면, 2024년 7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