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고전기 예술 ③

신화에서 역사로

<수년간 성을 공격하던 군사들은 지친 듯 물러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곧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했고 곧 성 밖에 그것을 남겨두고 떠나기 시작했다. 성안의 군사들은 쫓아 나와 그것을 확인해 보니 나무로 만든 거대한 목마였다. 승리의 기쁨에 취한 군사들은 흥에 겨워 춤을 추기 시작했고 곧 전리품으로 생각한 그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전쟁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읽고 꿈을 갖고 자라난 아이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꿈이 단지 소설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굳게 믿고 자란 소년이 있었다. 독일의 아마추어 발굴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성장한 후 사업에 성공한 슐리만은 어린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 문명 발굴 사업에 뛰어든다. 호머의 이야기를 증명하겠다는 결심 하나만으로 그는 무모한 계획 아래 발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끈 성과를 거둔다. 세계를 놀라게 하는 발굴의 역사를 이룬다. 에게해에서 흑해로 통하는 관문인 다르다넬즈 해협 입구인 소아시아의 작은 언덕 힛사리크 언덕에서 트로이로 추정되는 옛 성체를 발굴한 것이다.

호머의 이야기를 좀 더 읽어 보자.

< 승리에 도취한 병사들은 기쁨에 겨워 즐거운 나머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갈려고 하는데 이것을 반대한 사람이 한사람 있었다. 라오콘이라는 사제였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편을 도운 아폴로 신은 라오콘에게 벌을 내려 커다란 물뱀을 보내는데…… >

그리스 예술은 아테네 시절에 정점에 달하다가 헬레니즘을 맞이한다. 조각은 좀 더 섬세해지고 더 큰 움직임을 표현한다. 이 시절에 제작한 대표적 조각품 가운데 트로이의 상황을 묘사한 작품이 있다. 뱀에 물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의 모습이다. 거대한 뱀 2마리에 감겨 두 아들과 함께 상체를 뒤틀며 절규하는 모습은 인간의 고통 그 자체를 절묘하게 육체의 뒤틀림으로 묘사했다. 로도스 섬 출신의 3명의 조각가에 의해 공동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점령 하에 정치적으로는 변질됐지만 예술은 계속 발전한다. 뛰어난 묘사력과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한 조각품은 헬레니즘시기 내내 유행되다가 로마에 계승된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의 발굴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 본토에서 그리스 원정군의 본거지를 찾아 나섰다. 오랜 노력 끝에 트로이를 발굴한지 3 년 후, 발칸반도에서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향하는 관문인 코린토스 운하를 조금 지나 미케네라는 곳에서 드디어 원정군의 수장격인 아가벰논 왕의 본거지를 발굴한다. 슐리만은 그곳 왕의 무덤에서 황금가면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가면 뒤의 무덤 주인의 얼굴을 보았다.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아가뱀논의 얼굴을 본 것이다. 1876년의 일이다. 이로서 기원전 1400년부터 1200년경의 미케네문명은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셈이다.

미케네와 미노아문명은 아테네문화의 선조

흔히 유럽의 문명은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 본토에서 문명의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00년경이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훨씬 전인 기원전 2000년경에 이미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하는 에게 해에 문명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 문명을 크레타문명. 에게 문명 또는 미노아 문명이라고 한다.

미노아 문명의 미노아는 전설의 인물인 크레타의 미노스 왕에게서 연유된 것이다. 발칸 반도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거쳐 남하한 사람들과 이집트에서 북상한 사람들 , 그리고 소아시아와 키프로스 섬에서 서진한 사람들이 에게 해에 떠 있는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인 크레타 섬을 무역의 중심으로 활용함으로써 미노아 문명이 발달하게 된다.

미노아 문명의 존재를 분명히 밝혀준 사람으로는 크레타 섬에서 크노소스 궁전을 발견한 영국의 아더 에번스, 산토리니 섬에서 아크로델리를 발굴한 그리스의 마리나토스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미노아 문명과 그리스본토 문명을 연결 시켜줄 미케네 문명을 밝힌 사람은 소아시아 서쪽 기슭 힛사리크 언덕의 트로이와 그리스 본토에 있는 미케네를 발굴한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그들이 밝혀 낸 연구에 의하면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문명이 번창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2500년 무렵으로 이미 경작용 소를 사용하였고 농업이 발전하였으며 목축업. 어업을 병행하였다. 그들은 미노아 선상 문자 A라는 언어를 사용하였는데 아직 해독되지 않고 있다.

기원전 1500-1400년 무렵, 크레타 섬이 인근 섬에서 발생한 대지진과 화재로 붕괴직면에 처해졌는데 그 무렵 그리스 본토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미케네 문명이 등장한다. 이 미케네와 그 밖의 지역에서 선상문자 B라 불리는 문자가 기록된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영국의 건축가인 벤토리스가 1952에 풀이한 것에 의하면 선상 문자 B는 선상 문자A의 음을 빌어 표기한 그리스 어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미노아문명의 결정적 붕괴원인은 크레타 섬까지 미친 미케네의 세력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추측된다.

기원전 1100 년경부터는 북방의 도리아인이 남하함에 따라 미케네 문명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스는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리스에 문명의 빛이 다시 비추어지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800년경이 되어서이다. 그리스 서부에 있는 이오니아 제도 출신들이 역사에 새 주역으로 등장하고 나서부터이며 호머 이야기도 이때 지어진다.

그들은 소아시아에도 진출했으며 자연 철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자연 철학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기원전 500년경이 되어서야 우리들에게 친숙한 그리스문화가 등장한다.

오늘날 서유럽문화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헬레니즘과 히브리즘. 그중 헬레니즘은 서유럽의 물질문화와 시각문화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르네상스를 겪고 근대에 이르러 더욱 더 심화된다. 근대 국가의 틀을 갖추는 바로크 이후에 서유럽의 강대국들은 그리스 고전에 더욱 더 심취한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셀리의 고대그리스 문명 예찬론을 다시 한 번 들어보자.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들이다. 우리의 법률, 문학, 예술… 그 뿌리는 모두 그리스다. 만일 그리스가 없다면 우리는 아직도 야만인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다음호에는 북 유럽 절대왕권시절의 상징인 프랑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020년 8월 7일, 1181호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