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8)

Römische Baudenkmäler, Dom und Liebfrauenkirche in Trier


0교포신문사에서는 2022년 특집 기획으로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매주 연재한다.
독일은 서독 시절이던 1976년 8월 23일 유네스코 조약에 비준한 이래, 48건의 문화유산과, 3건의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아픈 역사도 갖고 있는데, 2009년 현대적 교량 건설로 인해 자연 경관이 훼손됨을 이유로 드레스덴 엘베 계곡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서 제명된 것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제명된 첫번째 사례였다.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등재일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1986년 트리어의 로마시대 유적과 대성당, 그리고 성모교회(Liebfrauenkirche)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모젤(Moselle) 강 연안에 있는 트리어는 시저의 갈리아 전기에서 언급되며, 고대 로마도시의 하나로 대두되었고, 1세기부터 로마의 식민시로 지정, 이후부터는 대규모 무역 중심지였다. 3세기 말엽 사분 통치(Tetrarchy) 시기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 중 하나가 되어 ‘제2의 로마’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서 로마 문명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네슽코 심의위원회에서는 트리어 유적의 등재 기준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검은 문(Porta nigra)은 커다란 석재로 지은 요새화된 거대한 성문으로, 양쪽에 반원형의 4층 성채가 자리한 2세기 로마 건축의 독특한 산물이다. 포포(Poppo) 대주교가 1034년〜1042년에 성벽 안에 지은 2층으로 된 교회 건물의 성가대 좌석과 회랑의 유적은 이 기념물의 가치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둘째:, 트리어에 밀집한 수준 높은 유적들은 로마 문명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곳에 보존된 유적으로는 교량, 요새화된 성벽 유적, 공중목욕탕, 원형 극장, 창고 등이 있다. 이겔(Igel) 기둥을 유적으로 지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례 예술과 도기 제조술, 유리 세공술, 화폐 주조술이 특히 번성하였다.

셋째, 트리어는 이스탄불과 함께 로마 제국 분할 이후 대규모 로마 수도였다. 팔라틴 홀과 제국 목욕탕(로마에 있는 디오크레티아누스 목욕탕과 카라칼라 목욕탕 이후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규모)과 더불어 황제 궁전의 유적은 규모 면에서 인상적이다. 북쪽 바실리카(현재의 대성당) 아래의 황실 구성원(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와 그의 아내 파우스타)을 식별할 수 있는 천장 벽화 장식은 궁전의 특성을 보여준다.

넷째, 트리어는 인류 역사의 주요 사건과 직접적·실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을 위해 진격하였는데, 이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인정한 밀라노 칙령의 전주가 되었다.

이러한 기준으로 트리어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트리어의 로마시대 일반적인 집단 주택은 대부분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의 통치 시기(41~54)에 건설되었으며, 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크게 확장하여 성벽을 건설하였다. 성벽은 남쪽으로는 산업 지역과 근처의 목욕탕을 포함하였고, 동쪽으로는 동서 대로를 넘어서 확장된 원형 극장과 경마장을 포함하였다. 또 모젤 강 위로는 사암과 현무암으로 다리를 건설하고, 동서대로를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258년과 268년 사이에 포스투무스(Postmus)가 국경에서 프랑크족과 알라마니족이 위협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트리어가 최초로 수도가 되었다. 293년 로마가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 브르타뉴(Brittany)와 골(Gaul)의 통치자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이곳으로 이동해 왔고, 트리어는 수도로서 위치를 더욱 굳혔다.

이 도시는 ‘트레베리스(Treveris)’로 이름이 바뀐 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06년 이후 대규모 도시로 재건하였다. 복원된 원형 극장과 공중목욕탕, 원형 대경기장,‬몇몇 집단 주택을 철거하고 건설한 거대한 궁전 유적은 사분 통치로 형성된 새로운 균형에 근거하여 의도적인 정치적 선택을 반영한 것이다.

트리어는 인류 역사의 주요 사건과 직접적·실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313)으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 종교로 인정하였다.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집권 20년을 기념하여 트리어에 바실리카풍 교회당을 2개 건설하였는데, 이 건물은 현재 대성당과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남아 있다. 337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한 뒤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가, 그 다음에는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와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트리어에서 거주하였다.

트리어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골(Gaul, 갈리아) 지방의 주도이기도 하였다. 이 도시의 행정 구역은 게르만 국경에서 대서양까지, 하드리아누스 방벽에서 모리타니(Mauritania)의 탕헤르(tánger)까지 넓게 걸쳐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재위 기간에 기독교가 확산된 데에서 트리어 최초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고트족의 침략은‪ 트리어의 쇠퇴를 불러왔다.‬

오랫동안 주요 기념물들은 건축 당시의 목적대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방문객을 만났던 팔라틴 홀은 프랑크 귀족의 궁전이 되었다. 1200년경에는 선제후였던 트리어 주교들의 소유가 되어 1615년〜1647년에 이 큰 홀이 주교 궁전의 일부로 사용되었다. 검은 문(Porta Nigra)으로 알려진 로마 시대 성문도 그대로 유지되어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다른 건물들은 형태는 변했으나 용도 면에서는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 바실리카 풍 교회당은 11세기와 13세기에 거의 완전히 재건되었으며, 초기의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편 현재 교포신문에서는 “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 트리어편”이 연재 중이다. 트리어에 관심있는 독자들은 교포신문 홈페이지(www.kyoposhinmun.com)에서 역사산책 전 편을 살펴볼 수 있다.

1256호 31면, 2022년 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