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 /105

한국 여성계의 선각자들 ④ – 한국 ‘패션계의 대모’ 노라노

한국 ‘패션계의 대모’ 이자 그의 삶이 곧 한국 패션사이기도 한 노라노의 지나온 세월은 잔잔하지만 강렬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17세에 결혼한 노라노는 19세에 이혼했다. 사실 그의 결혼은 일제시대 위안부나 근로정신대 동원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진 것이었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일본 육사 출신 남편은 전쟁터로 나갔고, 홀로 고된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보상금을 의식한 듯 시부모는 그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는 종전 후 어느 날 살아 돌아온 남편의 등장에 선택의 길을 맞이한다. 다시금 시댁으로 발걸음을 돌리지만 고된 시집살이를 감당하며 사느냐 아니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느냐의 갈림길에서 갈등한다. 그는 이혼을 결심하였다.

이혼 후 그는 미국 유학을 하면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처럼 이제부터는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한다. 개명도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노명자에서 노라노가 된 것. 이제부터 그녀의 삶이 펼쳐진다. 여성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여성 전부의 삶을 함께 개척해 가는 것.

이 선택은 개인을 넘어 한국 패션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순간이었다. 50년대 첫 패션쇼와 60년대 기성복, 70년대의 미니스커트 열풍까지 한국 패션사의 출발은 사실상 그의 이 같은 선택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KBS 초대 방송국장인 노창성씨와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였던 이옥경씨의 9남매 중 차녀로 태어난 노라노는 경기여고 졸업 후 1948년 미국유학을 떠났다. 프랭크웨곤 테크니컬칼리지에서 의상을 전공했다. 여성도 확실한 직업을 가져야 자유로워지며, 성공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낮엔 공부하고 밤엔 의류공장에서 실무를 익혔다. 1950년 귀국, ‘노라노의 집’이란 양장점을 열어 1950년대 서울 명동에서 ‘송옥’, ‘아리사’ 등과 함께 고급의상실 붐을 일으켰다.

1950년대의 패션리더들은 미군부대의 연예인들. 노라노는 패션디자이너였지만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쇼의 사회를 보기도 하고 가수들 옷차림을 조언해주는 등 코디네이터나 매니저 구실도 했다.

1950년대 장세정, 이난영, 유정희, 홍청자, 서봉희 등이 모인 ‘저고리 시스터즈’부터 1970년대를 풍미한 펄시스터즈에 이르기까지 가수들의 의상과 무대매너도 지도했다. 또 극단 신협의 연극의상, 영화의상, 심지어 미스코리아의 샤프론으로 세계미인대회까지 참여하며 명성을 쌓았다. 국내 최초로 드라마 의상 협찬을 한 이도 노라노이다.

기성복 붐이 일자 홈웨어를 만들기도 했고, 1971년부터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여했는데 미국 삭스백화점 바이어로부터 주문을 받아 수출도 시작했다. 1978년에 미국법인을 설립하고 뉴욕에 진출, `7번가의 여왕’이란 찬사를 받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칸딘스키, 미로 등 세계적 미술가의 작품을 실크프린팅한 그의 옷들은 `미국의 중산층 옷장에는 한 벌씩 있는 필수품’이란 말을 들을 만큼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세계 패션계가 피크였던 1980년대의 영화를 실컷 누린 그는 1990년대에 다시 무대를 옮겼다.

서울올림픽 이후 원단과 패턴을 들고 1989년 중국으로 가서 합작공장을 세웠다. 중국측에서 `1년에 50만 벌도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쳐도 안 믿었는데 정말 한 해엔 실크블라우스 50만 벌을 만들어 1000만 달러를 수출했다. 또 IMF 무렵에는 이마트 등 할인매장에 한 벌에 2만~3만 원 하는 저가 옷을 만들어 팔았다.

주변 사람들은 노라노를 완벽주의자이자 절제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패션공부를 할 때도 디자인만이 아니라 재단, 바느질까지 다 배웠고 연극의상을 만들 때는 어머니의 벨벳 치맛감을 가져다 김동원씨가 입을 햄릿의 의상을 만들어 우리 연극사에도 기여했다. 또 항상 신문, 잡지, 신간 등을 읽어 트렌드를 정확히 파악하고 어떤 연령이나 직업을 가진 이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노라노에게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

“나는 옷을 통해 여성의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 이 말이 노라노의 모든 삶을 대변한다. 그녀는 단지 옷을 팔아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제 말기, 그 엄혹한 시대에 공부를 하고, 한국전쟁의 그 참혹한 시기에 패션 디자이너를 하면서 그녀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고, 그 자각을 패션을 통해 실천했다. 그러니까 노라노의 패션은 유한 부인들의 한가한 놀이나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실천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다른 말에서도 드러난다. 2012년에 개최된 노라노 60주년 기념전 ‘라비 앙 로즈(La Vie en Rose)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전시회를 기획한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이 첨단 소재와 노라노의 패션을 결합하려하자 노라노는 참고 참다가 한마디 한다. 자신은 입을 수 없는 옷을 만들지 않는다고. 단지 전시회를 하거나 패션쇼를 위한 옷은 만들지 않았다고. 이 한마디에 그의 패션 철학이 온전히 담겨있다. 그가 기성복을 디자인한 것도 저렴한 가격에 더 멋진 옷을 여성이 입게 만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패션을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을 착각이라고 말하는 노라노는 60년 동안 패션 일을 해 온 스스로를 노동자이자 장인이고 기술자라 생각할 뿐이다. “옷을 통해 여성들이 자존감을 갖게끔 노력했다”는 대중적인 철학이 혁신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그의 옷에 그대로 반영돼 있었던 것이다.

노라노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패션은 예술이 아니다. 옷이 예술품이 아니기에 사람보다 먼저 걸어 나와서는 안 된다. 옷은 입는 사람이 편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며 자신의 패션 철학을 다시금 강조한 적이 있다.

팔순을 넘긴 나이, 취미로 옷을 만든다면서도 노라노 선생은 치열하게 미래를 구상하고 있다. 호기심과 열정으로 빛나는 그의 모습은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를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다.

1290호 23면, 2022년 1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