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17)

사상 첫 문화재 구출 부대 ‘모뉴먼츠 맨’ ➄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독일 국보가 된 전설의 이집트 미녀 ‘네페르티티’ 운명

연합군의 ‘기념물, 예술품, 기록물 지원부대MFAA’ 요원 패트릭 켈러허(Patrick Kelleher) 대위는 독일 서부 비스바덴 중앙 수집품 저장소를 감독하는 책임을 진 무뚝뚝한 월터 파머 대위에게 지분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

1945년 12월 크리스마스, 파머는 수집소에 있는 문화재와 예술품이 손상되지 않게 잘 포장한 상자들을 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서는 잠시 떠났다.

그러나 켈러허는 저녁 파티에 예술 애호가 친구들을 불렀고, 한 상자를 열었더니 이집트 조각 가운데 가장 유명한 네페르티티(Nefertiti, B.C.1370(?)~B.C. 1330(?)) 흉상이 나왔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의 전설적인 미녀로 꼽힌다. 흉상은 B.C. 1345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300여 년간 온전했던 그녀의 흉상이 이번 전쟁의 피난 과정에서 전혀 훼손되지 않고 무사한 것을 본 이들이 너무 기쁜 나머지 흉상 위에서 잔을 들고 축배를 나누었다. 조금 떨어진 옆에는 헝가리 국민이 700여년간 국보 1호처럼 아낀 ‘성 이슈트반 왕관(Szent István király)’도 있었다.

마을에서 돌아온 파머 대위가 이 모습을 보고는 동료 장교가 내린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을 심하게 질책했다. 파머는 그러나 네페르티티 흉상은 이미 반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궁 주소지가 너무나 자주 바뀐 네페르티티

‘미인이 오다’는 뜻의 네페르티티는 1912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150킬로미터 남쪽 유적지인 투트메스 공방에서 긴 잠에서 깨어난 직후 납치되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독일의 고고학자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발굴해 잡동사니 속에 숨겨 몰래 반출했던 것이다. 이후 보르하르트는 발굴 후원자였던 유대계 독일 기업인 헨리 제임스 시몬에게 네페르티티 흉상을 선물로 주면서 1913년부터 독일에 체류하게 되었다. 이후 시몬 저택에 머물다 다른 발굴 예술품과 함께 베를린 박물관으로 갔다가 도굴과 반환 논란에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

1920년 베를린 박물관에 영구 기증되었고 1923년 일반에 모습을 드러내다가 1924년 베를린 이집트박물관에 공개되었다.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자태를 드러내자마자 아름다움의 아이콘으로 금세 유명해졌다. 왼쪽 눈이 미완성이지만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고대 이집트 여왕이 여전히 살아 있다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부활한 네페르티티는 1939년 전쟁이 일어나 박물관이 휴관될 때까지 베를린 신박물관을 궁궐로 삼았다. 그녀의 흉상은 ‘10대 약탈 유물’에 그리스의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 람세스 미라 등과 나란히 올랐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베를린 박물관이 폐쇄되면서 안전을 위해 모든 소장품이 분산되었다. 네페르티티 흉상은 프로이센 정부 은행 금고에 피신되어 있다가 1941년 가을 베를린 끝단의 대공포탑 벙커로 자리를 옮기면서 곡절 많은 이동이 본격화되었다. 한때 그녀의 흉상이 자리를 지켰던 베를린 신박물관은 1943년 영국 공군의 포격으로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파괴되었다.

1945년 3월 6일 이 흉상은 독일 중부 메르커스 소금 광산으로 다시 이동했다.

1945년 4월 미국 육군이 발견한 네페르티티 흉상은 MFAA 부대로 인계되었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라이히스 은행금고로 옮겨졌다가 8월에 배를 타고 마인강과 라인강을 따라 미군의 중앙수집소가 있는 비스바덴으로 이동했다.

미국이 네페르티티를 관리하게 되자 이집트 정부는 반환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집트에 새 독일 정부와 이 문제를 논의하라며 이 흉상을 서독 정부에 넘겼다.

네페르티티 흉상은 비스바덴 박물관에서 1946년부터 10년간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가 1956년 서베를린으로 넘어가 다렘(Dahlem)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동독은 1946년 초부터 네페르티티 흉상을 전쟁 발발 이전에 있던 곳인 동베를린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서독은 이를 무시했다.

1967년 흉상은 서베를린 교외인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이집트박물관에 자리를 잡고 2005년까지 있다가 베를린 구박물관으로 옮겨갔다. 2009년 10월 베를린 신박물관이 재개관하면서 70년 만에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네페르티티가 머나먼 이국땅 독일에서 제대로 된 왕궁을 마련하지 못하고 옮겨 다닌 상황을 보면 독일이 주장하는 대로 자국 문화의 일부이거나 국보로서 제대로 대우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의 반환 요구에 독일은 “네페르티티는 이미 독일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라며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은 엽서로, 흉상은 1989년 독일에서 우표로 제작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이집트 환수 운동 단체의 ‘네페르티티 여행Nefertiti travels’의 연대기에 따르면, 1989년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은 “네페르티티는 베를린에 있는 최고의 이집트 대사”라고 말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주소지가 바뀌기는 했지만, 네페르티티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이집트 출신 여성이자 고대 이집트 예술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홍보대사인 것만은 분명하다.

네페르티티 흉상에 대해 이집트의 환수 노력은 끊이지 않고 있다. 자히 하와스(Zahi Hawass) 전 이집트 문화재청장이 반드시 환수해야 할 유물 다섯 가지 가운데 하나로 네페르티티 흉상을 꼽으면서 2005년부터 유네스코에 반환에 개입해달라고 요청하는 등 회복 운동을 본격화했다.

1296호 30면, 2022년 1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