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해외로 피난 간 문화재
우리 문화재를 지켜라 ②
약탈품 반환의 역사는 깊다.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 유명 정치인이자 작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기원전 73년부터 3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지낸 베레스(Gaius Verres, BC 120?~BC 43)를 유물과 예술품을 훔쳤다며 재판에 넘겼다. 전쟁이 아닌 평화시의 약탈과 절도이지만 베레스는 ‘로마에 대한 불충’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판결 직후 그가 시칠리아 사원 등에서 탈취한 유물들은 그대로 복원되었다. 문화재와 예술품 반환의 최초 기록 사례다. ‘정복 제국’ 로마에도 반환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약탈 문화재 환수는 유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 변경이나 한 나라의 컬렉션 부족 부분을 채운다는 문화적 자존심 높이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제자리 찾기라는 도덕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약탈에 스며든 역사적 핏빛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힐링의 길이다.
우리 문화재와 예술품들은 파괴와 약탈의 전쟁에서 어떻게 위기를 넘겼을까.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 6월 북한의 기습 공격에 서울은 단 사흘 만에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인사들은 피난하기에 급급했지만, 우리 문화재와 유물의 안위는 고스란히 박물관 직원들이 떠안았다.
국립박물관이 1962년 공개한 한국전쟁 피해 현황을 보면 경복궁 만춘전에 보관하던 도자기와 의상 등 3,000여 점이 1950년 9월 24일 폭격으로 멸실되거나 훼손되는 등
피해 소장품이 무려 7109점에 이른다. 당시 만춘전이 처참하게 훼손된 참상이 사진으로 전한다. 반면 당시 부산으로 피난한 국립박물관 소장품 256상자 1만 21점, 덕수궁 미술관 소장품 174상자 8862점으로 약 1만 9000점은 박물관 직원들이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 목숨을 건 보호 덕분에 오늘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
■ 밤마다 종묘 경내에 땅굴을 팠던 박물관 직원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 공산당 관계 책임자들은 덕수궁도 불안했음인지 이번엔 종묘 경내의 숲속에 땅굴을 파도록 박물관과 미술관 직원들을 동원했다. 이곳으로 성북동의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포함한 기타 민간 소장품들을 모두 옮겨올 계획이었다.
밤마다 땅굴 파는 작업이 강행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유엔군의 극적인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의 임박으로 중단되고, 공산군과 공산당 조직은 서울 시가전 대비와 북으로의 후퇴를 서두르느라고 갈팡질팡이었다.
9월 20일, 한국군 해병대를 선두로 한 유엔군이 드디어 한강을 건너 서울 탈환의 마지막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때 경복궁 뒤뜰의 박물관 관사에서는 김재원 관장이 급히 영어로 된 신분증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드디어 박물관이 위치한 경복궁에도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앙청이 불붙고, 몇 채의 고건물이 날아갔다. 남쪽에서 쫓겨 온 공산군의 일부가 궁 안으로 밀어닥쳐서는 개인호를 파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서울에서의 마지막 저항과 시가전에 임하려 하고 있었다.
박물관 직원들은 무서운 포화 속을 뚫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유물이 있는 덕수궁으로 가서 모이기로 했다3. 개월간의 공산 치하에서 박물관 책임당원으로 등장했던 김영욱은 한 직원에게 “나는 북으로 떠납니다. 같이 가자곤 않겠습니다”는 말을 남기곤 사라져 갔다.
덕수궁 미술관 지하창고에 모두 무사히 모인 박물관 직원들은 각 자 최후의 안전처를 선택하여 미술관 건물과 옆의 석조전 지하실 금고 같은 곳으로 들어가 숨었다. 석조전에 포탄 하나가 명중하여 불길이 치솟았다. 유물이 보관돼 있는 미술관 건물이 불붙지 않은 것만이 천행이었다. 최악의 공포 속에서 며칠이 지나갔다.
9월 26일, 유엔군은 마침내 서울을 완전 탈환했다. 유물과 박물관 직원들은 극적으로 모두 무사했다. 이홍필 학예감이 석조전이 불탈 때 동료 직원의 안전을 확인하려고 밖으로 나왔다가 가까이에서 작렬한 포탄의 파편을 이마에 맞는 부상당했을 뿐이었다.(중략)
정부가 중공군의 개입 기미를 발표한 것은 서울이 수복된 지 20일 후인 10월 17일이었다. 국립박물관에선 평양박물관 접수 문제를 숙의하던 참이었다.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정세를 주목한 김재원 관장은 백낙준 문교부 장관을 은밀히 만나 국립박물관과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문화재를 남쪽의 안전지역으로 소개(疎開)하는 대책이 긴급하다는 점을 협의했다.
백 장관도 그 중요성을 금세 깨달았다. 그는 그 즉시 이 대통령에게 가서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문화재의 인식이 높았었다. “극비로 속히 서울을 떠나게 하라. 부산의 안전처로 모두 운반하되, 민심이 동요치 않도록 절대 비밀을 유지하라. 그리고 운반 도중
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되, 모든 기관이 협력하라.” 대통령의 긴급 비밀지령이었다.
미국 대사관에도 협력을 요청했다. 먼젓번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던 나머지 국가 문화재의 철수작전을 펼 겨를이 없었지만, 만약에 대처하는 이번 비밀 소개계획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미국 대사관에선 크네즈 문정관이 최대의 협력으로 트럭을 마련해주고, 유엔군 작전열차 속에 특별 화차도 주선했다.
1310호 30면, 2023년 4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