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용의 해’ 갑진년에 살펴보는 우리나라 3대 용문사(龍門寺) (2)

나라의 영원한 흥성을 빌기 위한 ‘왕의 절’

거대하고 신령한 용(龍)은 예로부터 임금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에는 3대 용문사가 있는데 양평·예천·남해의 용문사다. 왕실의 후원으로 지어졌거나 보수된 호국도량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각 사찰들의 위치는 남북으로 늘어져 있는데 한국의 오랜 불문율인 풍수지리학적 배치다. 양평은 용의 머리, 예천은 허리, 남해는 꼬리에 해당한다. 곧 3대 용문사는 조선팔도가 용과 부처님의 기운을 받아 영원히 번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작명이다.

◈ 양평 용문사

용문사(龍門寺)는 경기도 양평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양평군 용문면의 용문산 자락에 있다.

용문산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과 옥천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1,157m로 양평 북동쪽 8km 지점에 있다. 서울에서는 동쪽으로 42km 지점이다.

경기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문산은 경기도에서는 가평군의 화악산, 명지산, 국망봉 다음으로 높다. 북쪽의 봉미산, 동쪽의 중원산, 서쪽의 대부산을 바라보고 있는 용문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빼어나며 골이 깊다.

용문산이라는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용이 날개를 달고 드나드는 산이라 하여 이름을 용문산으로 부르게 했다는데, 본래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이었다.

산의 정상은 평정을 이루고 능선은 대지가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원산과의 중간에는 용계(龍溪) ·조계(鳥溪)의 대협곡이 있고 그 사이에 낀 대지는 수백 m의 기암절벽 위에 있어 금강산을 떠올리게 한다. 북쪽은 완경사, 남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첩첩이 쌓인 암괴들이 나타나며 깊은 계곡과 폭포도 볼 수 있고, 남쪽 산록 계곡에는 용문사 · 상원사(上院寺) · 윤필사(潤筆寺) · 사나사(舍那寺) 등 고찰이 있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 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 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관음전, 지장전, 미소전(오백나한전), 산령각, 칠성각, 요사채, 일주문, 템플스테이 수련관,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비와 보물 제1790호 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가 있다.

정지국사 부도와 부도비

고려 말 고승 정지국사(正智國師)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열아홉 살에 장수산 현암에서 출가했다. 처음부터 참선공부로 들어갔던 국사는 1353년(공민왕 2)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연경으로 들어가 법원사 지공화상과 대면한다. 거기서 먼저 들어와 있던 나옹화상을 만나고 중국 여러 곳을 만행하며 수도하다 3년 만에 귀국한다.

정지국사는 자취를 숨기고 수도에만 전념하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72세로 입적한다. 그런데 입적 후 사리 수습을 미루었는지 제자 지수의 꿈에 사리를 거두라는 분부가 내려왔다. 바로 그해 제자 조안은 용문사를 중창하고 있었기에 수습된 사리를 용문사로 모셔와 부도와 부도비를 건립했고 태조는 정지국사로 추증했다.

부도는 현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300m쯤 떨어진 동쪽 한가로운 언덕바지에, 부도비는 거기서 80m 정도 아래로 곧장 내려오면 편편한 천연의 바위면에 조촐하게 서 있다. 부도 높이는 215cm, 부도비 높이는 110cm로 보물 제5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교적 보존이 잘 된 편인 부도는 여러 장의 장대석으로 부도의 구역을 마련하고 그 중앙에 부도를 건립했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방형이고 중대석은 원형이며, 상대석과 몸돌 지붕돌은 8각으로 조성돼 있어 팔각원당형의 기본 틀에서 많이 변형된 부도라는 점이 눈에 띈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짧게는 1100년 길게는 1500년을 헤아린다.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라는 영예를 얻으며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높이 42미터에 밑동의 둘레만도 14미터에 이른다. 해마다 1백 가마니 가까운 은행 알을 털어낸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어 거대하게 빛난다.

은행나무의 모습은 우람하고 아름답지만 사연은 슬프고 쇠잔하다. 경순왕의 아들이자 신라의 마지막 왕세자였던 마의태자가 주인공이다. 국력의 절대 열세로 아버지가 나라를 왕건에게 갖다 바치자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했다. 상례(喪禮)에 입는 마의(麻衣, 베옷)를 걸치고 금강산에서 은둔하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숨졌다.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그가 자청한 귀양길의 길목에서 피었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의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게 별안간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경순왕은 왕건의 사위가 되어 일신을 보전했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1347호 23면, 2024년 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