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한국문화재를 만나다(4)

K컬처 세계에 알린 김준근의 풍속화, 해외 박물관에 더 많은 이유

비행기가 발명되기도 전인 19세기 후반,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서양 국가들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이미지가 있었다. 소위 ‘수출화(輸出畵)’로 불리는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풍속화로 널리 알려진 김홍도, 신윤복과는 달리, 김준근은 그 이름도, 작품도 조금 생소하다.

19세기 말 조선의 다양한 생활상 담은 기산 풍속화

김준근은 당시 조선의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명료한 형태와 다채로운 색채로 그렸다. 주로 놀이와 생업 등을 소재로 한 전통적인 풍속화와는 다르게, 그네뛰기와 씨름과 같은 놀이장면과 ‘시묘살이’, ‘초상난 데 초혼 부르는 모양’과 같은 상장례(喪葬禮), ‘곤장 치는 죄인’ 등 당시 사람들이 감상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장면들을 그렸다.

이러한 주제를 선정한 것은 작품의 주 수요층이 한국을 잘 모르던 서양의 외국인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준근은 외국인들의 취향에 맞춰 당시 외국인들이 많이 모이던 개항장에서 그림을 생산했고, 그의 그림은 항구를 거쳐 간 외국인들에 의해 전 세계로 확산했다. 그 결과 그의 그림은 현재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미국 등 전 세계적으로 1,500여 점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국내보다 해외 박물관에 더 많은 수가 소장돼 있다.

조선 방문 기념품으로 외국인 열광

조선은 오래도록 외국과의 무역을 금하다가 부산(1876), 원산(1879), 인천(1880)의 개항을 시작으로 일본뿐 아니라 미국, 중국, 영국, 독일 등에 차례로 항구를 개방해 통상을 시작했다. 이 시기 조선은 국가의 쇄신을 위해 활발하게 외국과 교류를 추진했는데, 이를 계기로 당시 여행가, 외교관, 선교사 등 많은 외국인이 조선에 들어왔고, 1890년대부터는 개항장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끼리의 커뮤니티가 형성되기도 했다.

19세기 말 서양 열강에서는 항해술의 발달과 교역의 확장으로 이국적인 문화와 풍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들의 삶과는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여행가들의 기행문이나 삽화, 그들이 들여오는 이국적인 물품 등에 대한 소비가 확산됐다.

조선에 머물렀던 외국인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또는 민속학적, 인류학적 관심에 기반한 본국의 의뢰를 받아 조선의 특징적인 문화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을 수집해 고국에 보냈다. 당시 조선에서 외국인들이 구입한 수집품의 대상은 도자기, 의복, 생활용품 등 매우 다양했다.

독일 함부르크의 로텐바움 세계문화예술박물관에는 당시 조선에 머물고 있던 외교관이었던 에두아르트 마이어에게 구입을 의뢰한 서신과 구입 희망 목록이 보관되어 있는데, 조선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알 수 있어 흥미롭다.

구입 희망 목록에는 △중국어나 한국어로 쓰인 한국에 관한 내용을 담고 가능하면 삽화가 포함되어 있는 책들 △사회적 신분등급을 의미하는 각 종류의 모자들 △무복(巫服)과 도구 및 신칼 등이 있다. 그중에서 기산 풍속화는 특히 19세기 말 전통적인 한국의 여러 생활상을 담아 외국인의 구매를 유도한 문화적 매개체로서, 조선을 알지 못했던 지인들에게도 기념품으로 나눠줄 만한 것이었다.

조선 해관 근무 오이센 수집품 대거 남아

덴마크 국립박물관에는 총 98점의 기산 풍속화가 소장돼 있다. 그중 89점은 구입과 개인 기증으로 박물관에 들어오게 됐는데, 이는 모두 19세기 말 한국에 머물렀던 덴마크인 야누스 오이센의 소장품인 것으로 확인됐다. 오이센이 소장했던 기산 풍속화는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민족학박물관에도 20점이 있다.

조선도 개항을 하며 뒤이어 1883년에 해관을 설치했고, 주로 청나라의 해관을 경험했던 외국인들이 조선 해관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1889년 오이센이 조선 해관에 배정됐다. 그는 1900년까지 원산에 머물며 근무했는데, 현재 덴마크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기산 풍속화는 이 시기 오이센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기산 김준근에게 직접 주문해 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에 따르면, 기산 풍속화는 각각 다른 과정을 통해 박물관에 입수된 탓에 한국의 그림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각각의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한국인의 삶,’ ‘문화적 이미지’ 등 모호한 용어로만 설명돼 왔다. 그 의미와 가치가 재조명받게 된 건 1983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한국 알리는 외교적 역할도

조선에서 구입한 수집품을 고국으로 보낸 것은 오이센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을 여행한 민속학자 샤를 바라의 수집품(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과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의 딸인 메리 슈펠트의 수집품(미 스미스소니언기록보관소 소장)에도 기산 풍속화가 포함돼 있다.

또한 베이징 주재 네덜란드 공사관에서 근무한 라인은 조선을 방문한 적도 없으나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를 수집해 네덜란드 국립민족학박물관에 기증한 바 있다. 이 외에도 현재 미주, 유럽 등 서구 문화권의 여러 박물관에 자국의 외교관, 선교사, 상인들에 의해 19세기 말 수집된 기산 풍속화를 확인할 수 있다.

여러 박물관에 소장된 기산 풍속화는 그 필치나 양상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결국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 엽서보다 조금 큰 정도의 크기인 기산 풍속화는 개항기의 외국인이나,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의 모습 대신 전통적인 한국의 문화와 생활상을 담아 외국인이 여행을 기념하고,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외국인의 취향에 맞춰 그들의 시각으로 제작된 기산 풍속화는 기념품으로 수집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또 단순한 개인적인 여행 기념품을 넘어서, 머나먼 이국땅을 방문하지 못한 고국의 지인들에게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알릴 수 있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1348호 30면, 2024년 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