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B 25주년과 문화적 다양성

코트라 함부르크 무역관 윤태현 과장

보통 해외여행을 가면 일반적으로 세우는 계획들이 있다. 본인이 계획형이고 비계획형인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며칠 동안 어느 도시에서 머물지를 생각하고, 그리고 그 도시에서 얼마나 숙박할지 호텔이든 에어비앤비 등을 예약한다. 또 국가에 따라서는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지 등을 미리 찾아본다. 거기에 더해 해외여행을 할 때면 환전이 빠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만 가더라도 원화를 엔화로 환전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환전할 일이 드물다. 사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독일에서 쓰는 유로를 가지고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어디를 가도 다 쓸 수 있다.

특히 현금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북유럽의 국가들을 포함한 동유럽 등의 국가에서는 현금조차 필요 없는 경우가 많다. 카드 하나만 있으면 유로존 어느 나라에서든 물건을 구매할 수 있고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 유로존은 아니지만 유럽연합에 속하는 국가에서도 환전을 할 필요가 없다. 코루나를 쓰는 체코나 즈워티를 쓰는 폴란드에서도 독일 카드만 있으면 수수료 한 푼 없이 결제할 수 있다.

이처럼 공통된 화폐를 기반으로 각기 다른 나라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것이 유로존(Euro Zone)의 핵심이다. 유로존은 유로(€)를 쓰는 국가를 모은 경제 구역을 뜻하며, 가장 최근인 2023년 1월부터 유로를 쓰는 크로아티아를 포함해 현재 기준으로 총 20개 국가가 가입해있다. 총 3억 4천 명이 쓰는 화폐다. 시장조사기관 슈타티스타에 따르면 2022년 12월 기준으로 유로는 미국 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스위프트(SWIFT) 결제를 하는 데 활용된 화폐다. 전체 스위프트, 즉 국제 결제 금액 중 달러는 47%이고 유로는 31%에 달할 정도로 유로는 국제적으로도 통용 가치가 높은 통화다.

이처럼 유로를 쓰는 유로존의 경제를 총괄하는 곳이 바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ECB)이다. 유럽중앙은행은 1998년 설립되어 지난 6월 1일 설립 25주년을 맞았다. 1998년 설립 당시 11개였던 유로존 국가는 현재 20개까지 늘어났다. 설립 25주년 행사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유로존은 유럽 통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며 “유럽중앙은행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유로존의 물가 안정과 견고한 경제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중앙은행의 설립 과정에서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빼놓을 수 없는 조약이다. 유럽 통화 조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에 1992년 당시 유럽 공동체(EC) 국가들이 서명을 하며 유럽의 단일 통화를 만드는 데 합의했다. 이를 토대로 1993년 유럽 통화 기구(EMI)가 설립됐고, 유럽연합 소속 15개 나라 정상들이 브뤼셀에 모여 유럽중앙은행의 설립과 유럽 단일 통화 경제 체제의 출범을 공식 선언했다. 이를 통해 1998년 유럽중앙은행이 세워졌고, 2002년 1월 1일부로 유로 화폐가 공식 도입됐다.

유럽중앙은행의 설립 취지는 유로존 내 물가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고용이나 경제 성장도 고려하지만, 물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중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 2% 미만이면서 가장 근접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유럽중앙은행은 유로존 금리를 설정하고 관리한다. 6월 현재 기준 금리가 3.75%인 것처럼 유럽중앙은행은 6주마다 한 번씩 행정이사회(governing council)를 열고 인플레이션, 경제 성장 등 다양한 지표를 평가하여 금리를 결정한다. 이사회에는 6명의 이사회 구성원과 유로존 내 국가별 중앙은행 총재들이 참석하여 투표를 한다.

이렇게 설정한 금리는 주요 은행들이 유럽중앙은행으로부터 차입할 수 있는 이자율이다. 이를 통해 유럽중앙은행이 통화 정책 전반을 관리하고 시장 내 자금의 유입 규모가 정해진다.

또 물가 안정과 더불어 유로존 국가들은 환율 변동의 위험과 통화 교환의 불편을 없애고자 했다. 이를 통해 국가 간 교역을 확대했고 국민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자국의 경제력에 따라 혜택을 볼 수 있는 이점도 많다. 상대적으로 약소국일 경우에는 독일 등의 높은 신용도 혜택을 받아 저금리 국채 발행이 가능해졌다. 반대로 강대국은 유로존 내 자유로운 무역과 자금 유입 증가로 시장이 확대되는 장점이 있다. 이를 통해 자국 내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유로존은 각국이 자신의 환율을 결정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경제가 나쁠 때는 화폐가치를 떨어뜨려 경쟁력을 갖춰야 했지만 유로존 국가들은 그럴 권리가 없다. 금리도 유럽중앙은행이 결정했다. 경기의 부침에 따라 금리를 오르고 내리는 조절 장치 자체를 상실한 것이다. 이로 인해 경제 위기가 오면 기업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상품 경쟁력도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단점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미국의 금융 위기는 유로존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이른바 PIIGS로 불리던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타격이 심했다. 그리스는 국가 부도의 위기가 우려될 정도였으며 스페인의 실업률은 50%까지 치솟았다. 유로존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목소리도 한때 심했다.

이후 유로존 국가들은 재정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인상하는 혹독한 긴축 정책을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했다. 근로자 해고, 복지 정책 축소 등을 단행해 근로자들의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되었지만 기업들은 경쟁력을 서서히 되찾기 시작했다. 시련을 극복한 유로존, 그리고 유로는 현재 다시 시장 영향력이 매우 높은 화폐로 인식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유럽인들의 기본 정체성은 하나의 단일 공동체를 뿌리로 한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국가의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한다.

다시금 서두에서 언급한 해외여행을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해외로 나오는 것은 준비 과정이 긴 일종의 ‘일(task)’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 반면 유럽에서는 언제든지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국경 자체가 없고 마음만 먹으면 몇 시간 만에 다른 나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리적인 사실에 더해 이웃 국가에서 동일한 화폐를 쓴다는 것도 큰 영향을 미친다. 심리적인 장벽이 훨씬 더 낮아지기 때문이다. 물리적 이동의 자유로움은 유럽인들의 사고의 폭 자체를 넓게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마치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이 저서 <유러피언 드림>에서 “유럽인들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한다.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과 삶의 질, 환경보전을 염두에 둔 지속 가능한 개발을 강조한다”라고 얘기한 것처럼 말이다.

1318호 17면, 2023년 6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