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해로(HeRo) 특별 연재 – 생명 존엄을 위한 마지막 서류

2015년에 시작된 HeRo(해로)는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늙어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코멘트에서 출발했다. 해답은 늘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도움활동의 필요성으로 귀결되었다. <해로>의 입술로 연재를 시작하지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재독 동포들의 목소리를 그릇에 담으려 한다. 이 글이 고단한 삶의 여정을 걷는 이들에게 도움의 입구가 되길 바란다(필자 주)

8/ 생명 존엄을 위한 마지막 서류

독일은 역사적으로 나치시절, 정신지체장애자 및 유태인 등을 살아야 할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라 명명하고 조직적으로 살해한 과거가 있다. 그러한 씻지 못할 과오 탓인지 생명 경시는 중요한 화두가 된다.

자살을 도와주거나 자살의 의도가 있음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을 경우 법적 처벌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일찍부터 존엄성을 가진 죽음의 대안으로 완화의학이나 호스피스가 발달했는지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젊고 건강하게 생명을 보전하고 싶지만 아무도 예측 못할 중병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무거운 질병의 고통을 움켜쥐며 처절하게 죽어갈 것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대안의 일부로 독일에서는 안락사와는 본질적 의미가 다른 법적 절차를 도입했다. 즉 질병상황을 대비해 미리 생명연장 여부를 서면으로 명시해두는 제도다.

의식불명이나 중병환자에게 ‘더 이상의 무의미한 생명연장의 가치가 있는가’라는 의문 속에 ‘Patientenverfügung'(사전연명의료의향서)이 발효되었다. 사실 이 법 제정 전에도 독일 내 100만 명 이상이 임의로 자신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두었다는 통계가 보도된 적 있다.

사단법인 <해로> 호스피스는 만약의 위급상황을 위해서, 원하는 분에 한해 ‘환자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작성을 무료 서비스하고 있다. 즉 건강할 때 미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무의미한 생명연장 수단의 중단여부를 미리 결정하고 명시하는 것이다.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한 환우들이 생명연장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누릴 수 있게 해, 진정한 인간의 기본권을 실천하도록 돕는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독일 민법 제 1901조 a항에 명시되어 있다. 꾸준한 검토와 사회적 합의 끝에 지난 2009년 9월 발효된 이 조항은, 삶의 질 뿐만 아니라 죽음의 질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 복지서비스의 진보적 그림이다. 다시 말해 ‘웰다잉’의 적극적 표현방법인 셈이다.

여기에는 환자의 처분결정의 발생시기, 환자처분 결정의 조건, 후견인이나 보호인들의 행동방침과 업무범위 등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서면작성을 원칙으로 하며, 만 18세 이상의 인지능력이 있는 사람이 작성해야만 효력이 발생한다. 물론 서면철회는 언제든지 가능하며, 어느 때에 작성한 것이 유효한지를 알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명확히 기입해야 한다.

이러한 관련 법률은 강제권은 없다. 또한 이 서류를 미리 작성했다 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등 의료적 노력을 중단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제도는 본질적으로 생의 마지막에 품위있게 임종을 맞이하고 싶은 욕구를 반영한 최종적 사회복지주의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혹여라도 다가올 고통의 순간을 대비한 사전 의사표시의 수단이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치권을 획득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삶의 마지막에 무의미한 생명 연장으로 고통을 받는 것보다 사전에 존엄성을 가지고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장치다.

사단법인 <해로>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일반 자원봉사활동과 임종을 맞는 환우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는 호스피스 활동이 양립한다. 이러한 활동과정에서 환우들과의 배려 깊은 면담을 통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Patientenverfügung)의 작성 제언도 곁들인다. 소중한 생명 가치를 위한 자기 결정권의 권역이기에 도움서비스에서 빠질 수 없다.

삶의 마지막은 노소(老小)에 상관 없고 서열도 없다. 그래서 누구나 순간순간 존엄한 죽음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이유다.

박경란/ 사단법인 <해로> Alltagshilfe 자원봉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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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6일, 1176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