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지의 무게

류 현옥

주말에 있었던 베를린 퀘프닉 구역의 정전 사고가 화요일 모임의 주제였다. 노트북을 들고 모이는 노인들의 모임은 명색이 컴퓨터 코스이지만 이 사건은 모이는 이유조차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유럽의 평화는 70년 계속되고 있지만 정전의 짧은 어둠은 전쟁의 참상을 회상시켜 선대로부터 트라우마로 연결된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 것이다. 잊고 살아온 온갖 상처는 물론이고 전후세대까지 계승된 정전의 어둠에 대한 공포심으로 존재해 왔다.

모두가 질서를 잃고 다투어 열을 올렸다. 특히 컴퓨터 강사의 설명으로 정전의 이유가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컴퓨터 사고라 하니 더욱 관심을 보이며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불과 40여 분간의 정전, 스판다우 구역의 반대편 베를린시의 작은 구역 쾨피닉에서 일어났지만 전 베를린 시민들은 “내일은 우리구역에서도 일어날 거 아니냐?”라며 흥분했다.

천만다행으로 그 구역은 큰 병원이 없는 곳이다. 인공호흡기에 매달린 환자가 정전으로 위협을 받지도 않았다. 냉장고 정지로 약품과 생명을 구하는 혈액이 부패하는 일도 없었다. 큰 회사에서는 비상 전력이 레이저로 자동대처를 하고 있기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도 알지만 평범한 가정생활에 파동을 일으키며 일상생활에 위협을 주고 지나갔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불신감으로 연결되었다. 당했던 주민들의 이야기는 갑자기 하늘에 뜬 태양이 사라진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되고 어두운 상태였다고 과장했다. 이런 사고는 책임추궁이 뒤따르고 국가보안 시스템과도 관계가 있다며 시당국을 비판했다.

모든 시스템이 전력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사는 인류는 꼼짝없이 전기의 힘에 의존해 있다. 전력회사 자체도 스스로가 생산한 전력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하다. 전력에 의지한 컴퓨터 시스템이 작동해서 움직인다. 40여 분이 지나서야 해결된 사고는 결코 작은 사고가 아니었기에 믿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다음에 더 크게 일어날 정전 사고를 대비하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들 다짐했다. 컴퓨터도 사람도 믿을 수 없으니 원시적인 생활방법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컴퓨터 강사는 언제 올지 모르는 파국적인 사고를 대비해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자며 준비해온 자료를 화면에 올렸다.

첫째, 양초와 성냥을 준비하여 집안의 곳곳에 배치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정전의 어둠속으로 빠져 들어갈지 모르기에. 둘째, 물이다. 물만 마셔도 40일은 연명할 수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미 정원 한 구석에 우물을 팠다고 자랑을 했다. 2천유로밖에 들지 않았다고. 플라스틱 병에 넣어 파는 생수보다 훨씬 질 좋은 지하수가 수동 펌프를 통해 쏟아져 나온다고 했다.

고층건물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어디에 우물을 파서 대비해야 하느냐고 묻자, 모아둔 쓸데없는 물건들 다 버리고 그 자리에 2리터 플라스틱 물병을 최소한 100개 정도로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기치 못한 재앙으로 급수가 안 될 경우 생명을 구하는 것이란다. 특히나 고층건물의 승강기가 정지되고 아래로 연결되는 계단의 정전이 될 경우를 감안해야 된다고. 최소 한 달 정도는 걱정 안 해도 될 물을 저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상상할 수 있단다.

또한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준비해서 저장할 생활 품목의 리스트를 열거해서 화면에 올렸다. 밀가루, 각종 통조림, 인스턴트식품, 각종 건조식품들 외에 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화장지다. 상하수도 공급이 전력에 의지한다는 것을 알지만 하수도가 불통되어서 초래할 파국적인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했다. 하수도의 물이 빠져나가지 않고 똥물이 거꾸로 화장대를 통해 나올 경우를 생각하면 천지 재앙이 극도에 달할 것이다.

강의가 끝나자 노인 학생들은 정지된 하수도와 화장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노트북들을 케이스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학생들은 컴퓨터 선생의 기우는 과잉반응이라고 쑥덕거렸다.

놀랍게도 이 시점에 이미 화장지의 의문을 더해줄 파국적인 일이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 시장통, 우환에서 시작한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번져나가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 그중 일부 병독은 평화스런 유럽행 비행기를 타고 오는 중이었다. 이 소식은 매스컴을 타고 있었지만 모두 먼 산의 불 보듯 했다. 사태는 시시각각으로 심각해졌다.

유럽공동체가 다시 민족주의 보수성을 들어내면서, “건강보험 시스템이 잘 된 우리 독일은 걱정 없다…!”고 생각했다.

문 앞에까지 몰려온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국경선을 복원시키는 아이러니로 대책을 강구하는 동안 이웃나라 이태리에서는 매일 몇 백 명씩 죽어 나갔다. TV 화면을 통해 장례를 치를 관이 품절되어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감염을 우려하여 가톨릭교인들, 국민들이 친밀한 고인과 작별하는 장례식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지구상의 인간계를 유린했다. 설마하며 담담하던 독일 사회가 갑자기 패닉 상태에 들어갔다.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밤사이에 국경을 넘어온 바이러스의 침입이 다음날 아침에 확인되었다. 두 나라를 연결하는 브랜너 터널을 통과하는 열 차 안에서 기침을 하며 열이 있다는 승객을 내리게 하여 검사했고, 음성 판정과 함께 다시 태워 기차가 움직일 때까지 4 시간이 걸렸다는 뉴스가 뒤따랐다.

방역대책으로 전례 없는 생활 규칙을 발표했다. 외출을 자제하고 다수의 사람이 만나는 곳은 폐쇄되었다. 병원방문과 생활필수품구입만 허용되었다.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사람들의 출근은 허용되었지만 65세 이상과 질병이 있는 위험한 사람들은 외출금지와 마트방문도 절제를 요구했다. 다람쥐 쇼핑이 시작되었다. 이 말은 다람쥐가 도토리를 주워 모아 곳곳에 저장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제일 먼저 화장지 품질이 보도된 것이 주목할 일이었다. TV를 통해 텅 빈 마트의 진열장을 보여주었다. 화장지 진열장 앞에 1인당 팩 하나 이상은 살 수 없다는 경고문이 붙었다. 여유 있게 아침 식사를 끝내고 마트에 가면 이미 화장지는 동이 났고 다음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신문 사설에는 바이러스는 호흡기병을 일으키는 데 화장지사재기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설이 올랐다.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가 소화기에도 침범한다고 발표되자 화장지 품절은 더해갔다.

다음이 밀가루였다. 인근 마트에서 40kg 밀가루를 쇼핑카트에 밀고 나오는 사람과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 사이에 시비가 일어났고 주먹다짐으로 발전하여 마트주인이 경찰을 부르겠다는 협박으로 끝이 났다. 한 사람은 근처에서 피자 가게를 운영하는 이태리 남자이고 다른 남자는 케밥집을 하는 터키인이다. 둘 다 밀가루로 생업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주로 독일인들인 구경꾼들도 밀가루가 필요하다고 마트주인이 익살스럽게 큰소리로 말하여 마트의 분위기를 바꿨다.

그날 저녁 8시 뉴스에 농림부 여장관이 TV에서 생필품 걱정은 정부당국에서 책임지고 보급을 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당부했다. 일간 신문의 칼럼에는 바이러스와 화장지, 인간의 심리관계에 대한 흥미 있는 삼각관계의 실마리를 풀어 볼일이라고 썼다.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의 풍자 소설 <신하Der Untertan>에 나오는 화장지 장면이 새삼스레 의미를 부여한다. 소설의 주인공 종이공장 사장은 결혼식 하객들에게 역사에 남을 일이라는 확신을 주장하며 그의 신제품 두루마리 화장지를 소개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에게 화장지를 두 손으로 들게 하여 시범을 보인다. 독일 남자들이 역사적인 증거물 화장지를 지구의 구석구석으로 운반하여 독일의 세력을 알릴 것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은 작가가 1906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8년 후에 마무리했다는 데, 1914년에 시작한 세계일차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발표하게 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소설 속의 두루마리화장지에 풍자적인 개조시문이 인쇄되어 있다. “세계를 정복할 게르만 남성들의 정신”, “두루마리 화장지는 세계시장을 정복할 최신제품으로 젊은 게르만 남자들의 강한 정신력이 전달될 것이며…”, “게르만의 민족주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전진할 …” 등이다.

화장지를 쓰는 사람은 변기에 앉자 배설작업을 하는 동안 정독하여 습득할 것이고, 일을 본 후 뒤를 닦는다는 것을 풍자로 문구를 담은 화장지의 개조시문은 다가올 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고 패전의 전조로 해석하는 문학평론으로 높이 평가됐다.

코로나는 정치, 사회구조 상 서로 무관한 모든 분야를 정지시켰다. 문화예술기관들이 문을 닫고 레스토랑과 카페가 문을 닫았다. 모든 학교와 도서실, 박물관도 문을 닫았다. 필하모니, 연극 영화관, 제스 지하실 모두가 문을 닫았다.

한마디로 먹고 사는 것 외의 모든 활동은 당분간 정지한다고 메르켈총리가 발표했다. 먹고사는 데 필요하지 않는 일을 생업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 일상생활이 갑자기 단순한 형태로 변했다. 일 년 치 예약을 하고 빈틈없이 계획에 의해 움직이던 나날이 탄력성을 잃고 느슨하게 움직였다. 모든 장거리여행이 취소되고 외출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시민생활을 걱정하는 가족장관의 가정폭력 경고가 여러 번 발표되었다.

여성 3대의 연극배우로 명성이 높은 카타리나 탈바하(Katharina Thalbach)여사가 딸과 손녀를 동원하여 인터뷰로 호소했다. “사람들의 인생을 즐기는 중요한 일, 예술 특히 연극이 없어도 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정치인들이 내린 규율로 예술의 중요성을 파괴해도 되는가? 일 년 내내 연극 영화관에 가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 전 국민 정신문화 생활 수준을 하락시켜도 되는가?”

인간관계에 중요했던 만남들도 화면 속의 만남으로 대치되었다. 사교 상 중요한 약속들이 코로나 위기로 용서되었다. 불편하게 억지로 한자리를 같이 해야 할 가족들의 만남에도 불참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생일잔치가 취소된 것은 바이러스의 위기가 가져온 득일 수도 있다.

여유 있게 아침식사를 끝내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마트에 간 사람들은 화장지가 쌓여있던 곳이 텅 빈 걸 발견하게 되었다. 몸속의 불안을 내장으로 배설 시킨 후 뒤를 닦고 일어서야 하는데 화장지가 품절이라니. 어떤 일을 깨끗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상황을 “똥 누고 뒤를 안 닦은 것 같다”는 우리말 표현이 있다.

이런 위기에는 절대 화장지가 더 필요하고 소비량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인가? 코로나 위기로 어수선한 시기에 화장지 사재기를 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수록 독일 사회는 점점 더 낯설어진다. 베를린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에 독일위생국장관이 화장지를 한 아름 안은 풍자화가 실렸다. 배경에는 부족한 면 붕대 대신 화장지로 온몸을 감은 두 사람의 환자모습이 보인다. 독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풍자화가 슈투트만을 천재라고 부른다.

2020년 6월 26일, 1176호 14,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