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야기-(17)

황만섭

1950년 미국공화당의 주도로 ‘비 미국인활동위원회’가 만들어져 마녀사냥의 무차별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매카시 선풍’이라고 불리는 광풍이 미국전역을 휩쓸었다. 위스콘신주의 초선의원이었던 매카시는 의회연설에서 국무부직원 중 206명이 공산당과 관련이 되어있다며 그 명단을 발표했다.

매카시의 폭로는 저명인사로까지 이어져 누구든지 공산주의자로 몰리면 모든 것을 잃었다. 매카시의 폭로는 법 위에 군림하는 무서운 존재가 되어갔다. “저 사람은 공산당!” 이라는 그의 말 한마디에 지적당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뒤에 그가 한 말들이 모두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거지가 되고 폐가망신하고 난 뒤에 밝혀진 일이었다. 1954년 매카시는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정치무대에서 쫓겨났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매카시 광풍’은 한반도에 상륙했다. 한국에서도 공산당이라는 말 한마디에 운명이 갈렸고 거기에다가 새로 생긴 단어 ‘빨갱이’라는 말이 추가되면서 빨갛게 덧칠이 되면서 그 사람의 인생이 망가졌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했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변명하느라 바빴고, 변명 그 자체가 구차하고 초라했다. “빨갱이”라고 공격하기는 쉽지만, “아니라”고 방어하기나 증명하기는 어렵고 길었다. 종국엔 꼼작 못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은 공산당으로 몰려 투옥되어 고문당하다가 죽거나 암살당했다.

모택동과 스탈린은 북한을 돕겠다고 나섰고, 미국은 남한에서 떠난다며, 미온적이었으며, 최전선을 일본으로 한다는 애치슨 라인(미국무장관의 이름을 따옴)을 동해바다 한복판에 그어놓고 우리를 멀리했다. 이런저런 사정을 전해들은 북한은 마음 놓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고, 한국전 초반에 트루만은 중국, 소련과 마찰을 피하면서 몸조심만 했다. 1953년 아이젠하워(1890-1969)가 34번째 미국대통령에 취임했다.

우리나라 절반 크기의 포르투갈이 인도네시아, 브라질을 비롯해 22개의 나라를 식민지로 가졌고, 마카오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1557년부터 마카오를 뺏어 600년간 식민지로 사용하다가 1999년에 중국에 돌려주었다. 프랑스의 식민지는 32개국, 스페인은 24개국, 해질 날이 없다던 영국은 아시아에 21개 나라, 유럽에 2개 나라, 미국의 50개중에 40개 주, 아메리카 다른 지역에서도 12개국, 그리고 오세아니아에서 8개국의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마카오와 홍콩은 베트남 땅이었다. 영국이 제2차 아편전쟁에서 뺏은(1898) 홍콩은 99년 만에 중국에 돌려주었지만(1999), 이미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홍콩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중국치하가 바늘방석처럼 불안할지도 모른다.

1954년 5월 베트남의 디엔비엔프 계곡전투에서 호지민에게 대패한 프랑스는 정신없이 도망가면서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은 우리나라에서 38선을 그어 남. 북으로 나누듯이 베트남에서도 17도선을 그어 월맹과 월남으로 나누면서, 2년 뒤에 선거를 통해 다시 통일시켜주면 된다고 속였다. 소련은 선거를 하게 되면 틀림없이 호지민이 대통령이 될 거라는 계산을 했고, 미국은 일단 말만 그렇게 해놓고 우물쭈물 시간만 끌면 된다는 속셈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아시아의 나라가 하나 둘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도미노현상이 일어날 거라며, 아시아에서도 나토처럼 군사동맹을 만들 생각을 갖게 되었다. 델레스 미국국무장관은 바그다드 협정으로 서아시아의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을 결속시켰고, 거기에다가 터키까지 끌어들였다.

수에즈 운하(지중해-홍해 연결 1869 완공)를 끼고 있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아랍권 나라들을 조종하면서 계속 미국과 소련을 경쟁관계에 묶어놓고 자신은 제3세계를 꿈꾸었다. 이에 초조한 아이젠하워는 나세르에게 나일강의 이스완 댐 공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미국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그 약속은 취소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미국의 취소에 동조했고, 이에 격분한 나세르는 1956년 7월 26일 영국과 프랑스가 통제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연합군이 결속하여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중동전이 발발했고, 소련은 급히 이집트에 군사지원을 약속했다.

제2차 대전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미국은 아직 경기불황과 흑백갈등으로 허덕이고 있는 중에 다시 소련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어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중동전을 비난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러한 미국의 비난에 말 한마디 못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200년 동안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과 오랫동안 강대국이었던 프랑스는 이미 종이호랑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1896년 미대법원은 “흑인은 구별되는 것이지, 차별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웃기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학교, 공원, 화장실, 버스탑승까지 흑인과 백인들은 따로따로 사용을 해야 했었다.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은 군대에서 흑백차별을 공식적으로 금지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흑백차별을 없애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4년 공립학교의 흑백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고,

이 판결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끄는 무저항, 불복종으로 항거하는 흑인민권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킹 목사는 1955년 앨라배미주 몽고메리시에서 버스승차 거부운동을 시작했고, 1963년에는 링컨 기념관에서 20만 명의 청중 앞에서 그 유명한 “우리는 왜 기다릴 수 없는가?”라는 명연설을 했다. 1968년 이 위대한 흑인지도자는 암살당했다.

1962년 10월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소련미사일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미국전함을 동원해 쿠바를 봉쇄하면서, 쿠바에 들어가는 모든 배들을 수색할 것과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격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련은 이에 굴복하여 미사일기지 건설을 철회했고, 케네디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텍사스의 댈러스에서 오스왈드의 총탄에 암살되었고, 며칠 뒤 오스왈드는 또 잭 루비의 총탄에 죽었다. 오스왈드의 죽음은 케네디의 암살배경을 밝혀낼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 참조 : 먼 나라 이웃나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참조

2019년 10월 25일, 1144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