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한인 100년사 (6) – 마지막회

일제 강점기하의 재독한인과 활동들

김(Beckers)영자 박사

(지난호에서 이어집니다.)

독일과 프랑스를 넘나든 한인 유학생들
3.1. 이용제 (1896-1986)
함흥 태생인 이용제는 1920년 6월 11일 동료 한수룡과 함께 망명길에 나선다. 상해를 거쳐 같은 해 12월 14일 프랑스 마르세이항에 도착했는데 이 선박에는 중국인 유학생 외에 21명 한국 젊은이들이 타고 있었다. 마르세이항에 도착한 후 각자 목적지를 찾아 독일로 떠나기도 하고 일부는 프랑스에 남는다.
이용제는 일단 프랑스에 도착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노동일을 하면서 고학을 한다. 1922년 여름 독일 뷔르쯔부르그에 있는 친구 한수룡을 찾아가 – 당시 뷔르쯔부르그에는 한인 유학생이 약 30여명이 있었다 – 이들의 도움으로 일단 용기를 얻어 이용제도 뷔르쯔부르그 대학교에 등록을 하지만, 친구에게 신세를 지면서 학업을 계속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파리로 다시 떠난다.
독일의 마르크 파동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독일 뷔르쯔부르그에서 유학하던 많은 한인이 프랑스로 넘어온다. 이용제는 그 중 정석해에게 병원 일자리를 알선해주기도 한다. 고향 친구 한승룡이 프랑스로 건너왔다가 폐렴이 걸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자 친구의 입원비를 대준다.


3.2. 한수룡 (18?? )
이용제와 같은 함흥 출생이며 친구이다. 1920년 12월 14일 이용제와 함께 마르세이항에 도착해서 유학 목적지인 독일 뷔르쯔부르크로 떠난다.
1925년까지 뷔르쯔부르그와 뮌헨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1925년 독일마르크 파동 때 경제적으로 버틸 수 없어 파리에 있는 친구 이용제를 찾아갔으나 파리에 도착해서 폐렴으로 입원을 하게 되자 친구 이용제가 입원비를 부담한다.
이에 부담을 느끼고 한수룡은 병이 낳기도 전에 1928년 12월 병든 상태로 귀국한다. 귀국 후 함흥의과전문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3.3. 정석해 (1899-1996)
역시 중국 상해를 거쳐 프랑스로 건너온 유학생이다.
선천의 신성학교에서 수학하고 1916년 교원자격 시험에 합격하여 청성 프랑스인이 경영하는 소학교 교원으로 부임한다.
1919년 연희전문 Y.M.C.A.회장으로 3.1. 운동에 가담해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3.5일 남대문 역두시위를 주동하였다. 1920년 베이징을 거쳐 1920년 11월 7일 프랑스사의 여객선 Le Portos호를 타고 12월 14일에 마르세이항에 도착한다. 이 배에는 중국 젊은이들이 300명, 그리고 한국인 21명이 타고 있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한국인 중 7-8명은 생활비가 비교적 저렴한 독일로 떠났다. 파리 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의 주선으로 정석해와 이정섭은 보베 (Beauvais) 고등학교에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정석해는 1922년 독일 뷔르쯔부르크대학에서 정치경제학부에서, 1923년 베를린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4년 다시 파리에 돌아와서 철학과에 입학하여 사회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1930년 파리대학에서 수학과 철학공부를 마친 후에도 계속 대학에 머물렀다.
1939년 19년만에 귀국,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지만 변절한 동지의 밀고로 체포되어 동경으로 압송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석방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연희전문대학에서 철학, 수학, 물리와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1961년 퇴직한다.
퇴임 후 미국으로 떠나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외 독일에서 활동했던 인물들
위에 소개한 인물들 외에도 독일에서 활동한 한인이 적지 않으나 그들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극히 부족하다.
짧게 나마 알려진 바를 기록하자면, 이극로와 베를린에서 함께 활동한 항일운동가로 김준영, 김필수도 있다.
김준영은 일찍 귀국해서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베를린 항일운동 유학생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상호 협조를 했다.
4.1. 승려, 시인, 정치가 백성욱 (1897-1981)
백성욱은 서울 연희동에서 백윤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금강산 장안사로 들어가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1921년 초에 프랑스 보배의 고등학교에서 민영환의 아들 민병식, 민의식과 함께 어학을 공부한다. 민영환의 어머니가 손자 두명을 백성욱에게 맡겨 프랑스로 보낸다. (충정공 민영환은 1905년 을사조약 시 조약체결에 반대하다 뜻이 이뤄지지 못하자 자결을 했다).
백성옥은 1922년 독일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1925년 인문사회학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불교문헌 및 개념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한인으로써 최초 독일에서 박사학위 수여자는 의학부문 전공자로 1924년에 이미 4명이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후 즉시 백성욱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고 1930년대에 금강경으로 대중불교를 이끈 봉은사 최하응 스님을 은사로 불교승려로 출가했다.
그의 법명은 일곤이며 1948년 동국대학 교수를 거쳐, 1950년에는 내무부장관, 1953년에서 1961년까지 동국대학교 2대 총장직을 맡았다.


4.2. 독립운동가, 정치가 최두선 (1894-1974)
1894년 한성부(서울)에서 태어났고 육당 최남선의 동생이다.
유년기는 잠시 철원, 경상남도 창원에서 보냈고, 서울 휘문의숙을 최우등생으로 중등교육을 마쳤다. 그 후 일본 동경의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1917년 졸업을 했다.
1918년부터 김성수가 경영하던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에 취임했고, 다음해 교장이 되었다. 교장으로 재임하며 1920년 6월 결성된 조선교육회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21년 3월 총독부 촉탁으로 보통학교 교과용 도서 언문철자법을 조사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12월에는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해 활동하다가 1922년 5월 독일로 유학 길을 떠났다.
독일 마부르크 (Marburg) 대학, 예나 (Jena) 대학과 베를린대학 (Univ. Humboldt) 에서 철학을 수학했다.
이렇게 독일에서 3년간 철학과에서 공부를 한 후 1925년 10월 최두선은 귀국하면서 곧바로 중앙고보 교장으로 다시 취임을 했다.
제 8대 국무총리였으며 유엔총회 한국대표, 한국적십자사 총재를 맡았고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1974년 81세로 세상을 마친다.


4.3. 작곡가 안익태 (1906-1965)
안익태의 활동지는 일본과 미국이었다. 안익태가 유럽에서 활동한 시기는 1936년에서 1944년까지이다.
안익태가 베를린으로 온 동기는 당시 베를린에서 나치 정부의 비호를 받으면서 크게 활약하던 음악가, 작곡, 연주가였던 리하르드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와 유럽 연주를 하면서 친분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1930년 첫 유럽 연주 여행 중에 독일인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났고, 1940년부터 3년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게서 개인적으로 작곡과 지휘자 공부를 배우게 되면서 오랜 동안 상호 우정을 나눴다.
동시에 유럽 여러 도시 연주회에서 지휘자로 활동을 했다.
애국가를 작곡하고 연주회 중 합창단이 한국어로 합창을 하게 하지만 안익태는 친일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리하르드 슈트라우스는 나치정부하에서 일본정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1940년부터 그의 제자가 되고 지휘자로 활약을 했던 안익태 역시 이 관계 안에서 활약하게 된다. 베를린에 거주할 때도 일본인 영사의 집에서 기거를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친일파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지만 끝내 한국에서 환대를 받지 못하고 스페인 여인과 결혼해서 스페인에서 거주하다 베르셀로나 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친다.


4.4. 김갑수 (1894 – 1938)
김갑수는 상해 망명정부의 일원으로 1921년 베를린으로 와서 수학과 문리학을 수학한다. 그런차에 심한 병으로 공부를 중단하고 바이에른 주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몇 달을 지내면서 병을 치료했다고 전해진다.


4.5. 한국어 강사 강세형 (1899 – 1960)
강세형은 1931년부터 1934년 1월까지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철학과(철학박사)를 졸업했다.
1932년 초부터 1934년 초까지 2년간 베를린 대학교 동양학과 (Oriental- Seminar)에서 한국어 강의를 했는데, 자기보다 앞서 이 동양언어과에서 한국학을 가르친 이극로를 극찬한다.
이 칭찬안에는 자기 스스로를 ‘이극로의 후계자’로 자칭한 듯 하다.
독일을 떠나서 강세혁은 한국으로 가지 않고 일본 도쿄로 가서 ‘일본-독일 문화연구소 (Japanisch-deutsches Kulturinstitut)‘의 책임자가 되어 일본 독일간의 문화교류에 많은 공헌을 하면서 주로 히틀러의 유겐트 (Jugend)사상을 추종했다는 평을 받는다.


4.6. 항공 엔지니어 장극
장극은 장면가의 일원이다, 장극은 베를린 공과대학교 (Technische Hochschule)에서 항공공학을 수학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 때 손기정이 금메달을 수여받을 때 나치 항공대열속에 섞여서 공중에서 파라데를 해주어 조국을 잃고 일본기를 가슴에 달야야 했던 한인들에게는 웃지 못 할 씁쓸한 헤프닝이 되었다.


4.7. 법학자 김우영
이 외에도 프랑스에서 한국여성으로 최초의 화가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은 국내에서 변호사이며 법학자로 1927년 경 베를린에서 법학공부를 했다.

5. 나가며
독일에서의 한인이민 100년 초기 조선의 해방시기까지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재독 거류자 한국인은 망명 한인들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독 초창기의 디아스포라 한인에 대한 발굴연구는 아직도 본격적으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이번 내용은 재독 한인이주 디아스포라의 첫 발굴작업이지만 지속적으로 발굴작업이 이루어져서 한국의 숨겨진 근대사의 독립운동자들이 독일내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바로 이 것은 재독 차세대의 중요 연구과제로 남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