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또다른 명품, 독일 총리들(2)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명품 왕국 독일에는 제품·인프라·시스템뿐만 아니라 인물에도 명품이 많다.
경제적으로 ‘라인강의 기적’과 정치적으로 ‘베를린의 기적’을 이끌어온 ‘서독과 통일독일의 연방총리들’이야 말로 나치 정권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독일이 길러낸 최고 명장들이며 독일 국민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품이다.
독일의 연방총리를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강력한 서독(아데나워)- 시장경제와 경제기적(에르하르트)- 동방정책(빌리 브란트)-동서 데탕트 시대(슈미트)- 유럽 통합과 독일 통일(헬무트 콜)- 노동개혁과 독일병 처방(슈뢰더)- 독일병 치유와 EU 대주주(메르켈) 그리고 현재 올라프 숄츠로 이어지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건국-분단-냉전-성장-통일-통합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구성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폐허에서 기적을 일으킨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Adenauer, Konrad, 1876~1967)는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서독의 초대 총리로 재임한 인물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잿더미에 빠진 독일을 재건해 세계무대에 당당히 등장시킨 인물이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 재건을 이룩했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과의 관계 정상화와 소련과의 수교를 통해 서독이 국제사회에서 주요 국가의 일원으로 복귀하는 데 기여했다. 현대 독일의 시작을 이끈 정치지도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를 당시 서독에 뿌리내렸다고 평가받는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끌다

아데나워는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공업 중심의 산업육성정책을 펼쳐 큰 성공을 거두며 ‘라인강의 기적’을 이끌어냈다. 경제전문가가 아니지만 독일 경제를 부흥시킨 인물로 항상 아데나워가 거론되는 이유는 에르하르트를 기용한 뒤 흔들림 없이 지원한 정치적 리더십 때문이다. 아데나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에르하르트는 해외수출을 적극 지원했고, 폭스바겐 등 자동차산업과 철강산업을 발전시키는 등 독일 산업의 기반을 강화했다. 또한 화폐개혁과 국영산업 민영화 등의 구조개혁을 통해 1950년대 연평균 7%대의 고속성장을 견인했다.

아데나워의 선견지명은 외교 분야에서 특히 빛을 발했다.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세력과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200년간 25차례의 전쟁을 치른 프랑스와의 화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입, 대미협력 강화 등의 정책을 펼치고, 프랑스의 드골과 함께 유럽연합EU의 기틀을 세웠다. 그 덕분에 서독에 자유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그의 외교정책을 두고 독일 내의 중립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은 비판의 화살을 쏘아댔다. 그러나 그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의 굳건한 외교정책만이 독일의 통일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며, 통일보다는 자유주의의 가치가 우선한다는 외교방침을 굽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데나워의 서방 외교정책은 독일 경제에 번영을 가져다주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히 해 독일 통일의 기반이 되었으며,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아데나워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과 함께 지금의 유럽연합(EU)을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는 것이다. 그는 라인강 변에 세운 독일공화국을 평화 우호적인 문민정치의 새 나라임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프랑스와의 화해를 서독외교의 제1 우선순위로 뒀다.

나아가 스스로 발의, 주창해 서유럽경제공동체(EEC)를 설립시켰다. 프랑스 랭스 대성당에서 독·불 우호조약을 체결한 후 아데나워와 드골의 포옹은 그의 서방정책의 한 정점을 상징하는 광경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현대의 가장 타고난 재능이 있는 정치인들 중의 하나”로서 묘사되어 왔다. 국가로 이끌어진 과정에 독일을 세운 것에 그가 “거대한 성취”를 이룬 것으로 말해져 왔다. 그는 독일을 섬기는 데 연장자 총리였으며 87세의 나이에 떠났다.

아데나워는 전체의 인생에 실행적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기독교 사회 윤리들이 보건 사회의 근거였다는 것을 믿었다. 그는 가치들이 가르쳐진 학교인 사회에서 기초 일단으로서 가족의 강한 방어자였다. 그는 그 적이 아닌 방어자로서 세계의 국가들 중에 독일을 부흥시키는 데 세웠다. 그는 많은이들이 2개의 전쟁 뒤로 원동기로서 비난한 국가를 위한 도덕적 체면을 얻는 데 많은 일을 하였다. 1953년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타임 잡지는 이렇게 썼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훈족의 미워했던 대지를 이미 지도하였고, 나치를 도덕적 체면으로 도로 넣어 자신에게 서방 권력의 가장 높은 의회들에서 의석을 얻었다.”

1967년 4월 19일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딸에 의하면 그의 마지막 말은 “Da jitt et nix zo kriesche!” (울 일이 없다!)였다고 한다.

쾰른 대성당에서 열린 그의 국장은 다수의 세계 지도자들에 의하여 참석되었으며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도 참삭하였다. 장례식이 끝난 후, 그의 유해는 독일 해군의 콘도르 호에 타고 뢴도르프로 다시 운구되어, 발트프리트호프에 안치되었다.

1310호 29면, 2023년 4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