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Porsche)- 시대를 초월하는 브랜드 유산 ➀
우리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자동차의 패러다임 변화를 눈앞에서 보고 있다.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 ‘화석연료로 움직이는 자동차’, ‘이동수단인 자동차’ 등 우리에게 익숙했던 개념이 빠르게 과거의 것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기에 기존 기업들의 ‘전통’은 이른바 양날의 칼로 작용하기도 한다. 새로운 물결 속에서 변화하지 못하고 전통에 얽매여 쇠퇴하거나 전통을 재해석하고 발전시켜 다시 도약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전통을 두고도 전자를 ‘시대착오적 고집’이라 하고, 후자를 ‘헤리티지’라 한다.
자동차의 도시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가보면 헤리티지가 무엇인지 ‘클래스’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포르쉐(Porsche) 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창립자 페르디난트 포르쉐(Fernand Porsche)의 천재성에서부터 20세기 독일 현대사와 함께 성장해온 포르쉐 역사를 무게감 있게 느낄 수 있다.
젊은 천재 설계자, 그 자신이 브랜드가 되다
포르쉐 창립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천재적인 설계 재능과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지닌 자동차 엔지니어였다. 그는 1900년에 이미 오늘날의 자동차 트렌드가 된 전기자동차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고안했다. 다임러에서 근무할 때도 대형 위주 경주용 차량 개발에 1951년 르망에 첫 출전한 포르쉐서 벗어나 소형 경량 차량을 처음 개발해서, 52번 레이스에 참가해 51번 우승을 차지하는 독보적 존재로 군림했다.
포르쉐 박사는 다임러에서 경주용 차량 개발 책임자로 성과를 많이 올렸으나 다임러-벤츠 합병 과정에서 경주용 차량 개발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면서 해임되었다. 그러자 1931년 4월 자체 브랜드 ‘포르쉐’를 등록하고 차량을 독자적으로 개발함으로써 포르쉐 브랜드의 역사를 시작했다.
혁신의 가속 페달
포르쉐 박사는 경주용 자동차 개발에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이것이 독일의 기술력을 과시하려고 자동차 레이스를 장려한 당시 히틀러 정권의 입맛과 맞아떨어졌다. 1939년 9월 독일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함께 대규모 레이스 대회를 열기로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무산되었다.
이 대회에 맞춰 자체 경주용 자동차를 처음 개발해온 포르쉐 박사는 전쟁으로 대회가 언제 열릴지 불투명한 데도 표면상 개발 목적을 경주용이 아닌 기록측정용으로 내세우고 차량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939년 경량 구조와 송풍관에서 착안한 유선형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프로젝트명 TYP64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모든 포르쉐 모델의 기초가 되었다.
한편 차량의 대량 보급을 강력히 추진해온 히틀러는 포르쉐 박사에게 대중차 개발(일명 폭스바겐 프로젝트)을 일임했다. 히틀러는 대중차의 조건으로 휘발유 7리터로 100km 주행, 어른 2명과 아이 3명을 태울 수 있는 승차 공간, 정비성이 뛰어나고 엔진이 한파에 쉽게 얼지 않으면서 가격은 1,000 독일마르크 이하여야 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개발 스펙(Specification)을 내걸었다.
포르쉐 박사는 연이은 기술적 좌절과 시행착오에도 굴하지 않고, 끝없이 설계를 변경하고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하며 대량생산 방식인 ‘포디즘(Fordism)’을 도입해 3년 만에 모든 조건에 만족하는 차량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역사적인 베스트셀러 딱정벌레차 ‘캐퍼’(Käfer: 원래 명칭은 KdF-Wagen)이다.
캐퍼는 개발 직후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6년간 생산이 중단되었지만, 이후 대량생산되면서 2003년 단종될 때까지 총 2천150만 대 이상을 생산했다.
폭스바겐 프로젝트는 포르쉐 브랜드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차’ 개발에 집중해온 포르쉐 박사는 이로써 일반 대중을 위한 편안한 차량 개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계속 이어져 포르쉐는 지금 시골길, 구시가지 골목길 등 독일의 모든 도로에서 편안히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신차를 개발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포르쉐 911을 ‘데일리카로 사용 가능한 유일한 스포츠카’라고도 하는데, 이런 포르쉐 고유의 브랜드 가치는 폭스바겐 프로젝트에서 그 뿌리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911은 포르쉐의 첫 양산 모델인 356의 후속 모델이고, 356은 바로 폭스바겐 프로젝트로 탄생한 비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모델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브랜드 정체성을 지키다
포르쉐 차량은 모두 키를 삽입하는 방향이 스티어링 휠 왼쪽에 있는 특이한 구조를 채택했다. 이는 운전자가 자동차로 뛰어가 왼손으로 시동을 걸면서 동시에 오른손으로 기어를 조작해 출발하던 레이스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포르쉐는 ‘레이싱’을 브랜드의 일관된 핵심 DNA로 고수한다. 1951년 내구레이스 르망 24에서 우승한 것을 기점으로 각종 레이싱 대회에서 총 2만 8,000회 이상 우승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24시간 혹독한 레이스를 이어가는 르망 24에 60회 출전, 18회 우승은 포르쉐의 레이스 지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로 연비 효율과 실용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스포츠카 판매량이 전 세계적으로 급감했다. 경쟁 브랜드들이 연비 향상, 실용성 개선에 초점을 맞춰 판매 증진을 도모할 때, 포르쉐는 오히려 터보로 출력을 높인 911터보를 출시하면서 위기를 정면돌파했다.
위기에도 타협하지 않고 레이싱의 본질을 지켜낸 포르쉐의 고집스러운 열정은 전 세계 자동차 마니아를 열광시켰고, 포르쉐를 가장 포르쉐스럽게 만들어주는 고유한 정체성이 되었다.
1356호 29면, 2024년 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