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4)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잊어서는 안 될 이유’

21세기 한민족문화포럼 <한국인의 꿈> 대표 최 완

고종황제와 헐버트의 눈물 어린 전보교환

헐버트가 1905년 12월 11일 워싱턴에서 고종황제로부터 받은 전보내용, “나 대한제국황제는 1905년 11월 17일의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노라. 이 조약이 강박에 의해 맺어졌기 때문이다. 즉각 미국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민영환 공이 자결하였다. 격한 군중소요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최상의 방책으로 미국과 이 조약의 종결을 이끌어내길 바라오. 짐에게 전보를 치려면 ‘웨스턴 우니언코드’ 를 이용하시오”,

헐버트는 이 전보를 받아 바로 국무부에 가지고 갔으나 이미 상황은 끝났다고 하며 더 이상 대화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때 헐버트 의 급박하고 간절했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노한 그는 <뉴욕타임스>로 즉시 달려가 인터뷰한 내용이 12월 13일자에 “대한제국, 조약을 부인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나왔다.

고종황제의 전보내용을 상세히 소개하며, 헐버트는 “이 전보는 일본의 반역행위에 대해 한국이 발표한 첫 번째의 진정한 성명이다. 고종황제는 사실상 몇 주째 감금상태에 있었으나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바깥세계에 실상을 알리는데 성공했다. 조약이 우호적 환경에서 맺어졌다는 일본의 성명이 이제 거짓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라고 말했다고<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헐버트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직접 전하지는 못했지만 이 기사를 통해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부당한 철면피적인 만행을 미국국민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헐버트는 <뉴욕타임스>와 첫 인터뷰를 했던 다음날인 14일에 다시 <뉴욕타임스>를 찾아서 미국국민들에게 호소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제목은 “한국 황제를 위한 미국 국민에 대한 호소” 였다. 헐버트의 미국 방문배경 즉, 미국 백악관의 친서접수 거부, 미국 국무성 문밖에서 2일 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었으나 답변을 주지 않은 국무성의 헐버트에 대한 박대, 일본인들에게 핍박당하는 한국인들의 애처로운 처지 등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또 헐버트가 서울에 있는 고종황제에게 전보를 보냈다고 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사화 했다.

“이제 마지막 기댈 곳은 미국국민에게 호소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미국행정부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미국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여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겠습니다.”라고 답신했다고 보도했다.

나는 독자로서 이 상황을 그려 보며 가슴이 멍멍해 옴을 느끼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유일한 우방국이며 희망이었던 미국 대통령의 배신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빠졌을 고종황제의 모습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전할 수 밖에 없었던 헐버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가슴에 눈물이 응어리져 있었겠지만, 일제의 핍박에서 국권을 되찾아 고통 받는 국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은 두 사람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헐버트는 미국정계 유력인사들을 만나며,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국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었다. 한국을 일본에 넘긴 장본인은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아니고 바로 미국이다.” 라고 분노하며 미국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힐난하게 비판했다.

헐버트는, 우방국의 운명은 안중에도 없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국인 미국에 큰 실망과 좌절감을 안고 1906년 5월 22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헐버트가 미국을 크게 실망하며 원망한 것은, 고종황제가 미국을 순수한 마음으로 우방국임을 믿으며 금광채굴권, 철도부설권, 등 호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을 철저하게 배신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세계사에서 보면 국가 사이에 영원한 우방은 없었다. 그러므로 우방국을 신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자국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자주의식을 가지고 항상 대비해야 만 한다. 무조건 상대국에 의지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헐버트는 자신이 고종의 특사역할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을사조약’은, 고종이 서명을 거부한 것이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과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였던 역사적인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는 성공 했다.

헐버트의 한국독립운동은 미국의 언론과 의회 미국국민들을 상대로 강연활동과 한국전우회, 한미협회 등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또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문제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계획도 세우며 외교활동도 했다.

헐버트는 1907년 일본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 된 후 미국에서 38년간 자신의 영달을 마다하고 강연, 기자회견과 각 신문 잡지 등에 기고를 하는 등 그의 삶은 오직 한국독립운동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지은이 김동진은 증언한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된 헐버트

2차 만국평화회의는 1906년 8월에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초청한 것을 알아낸 일본은 ‘을사늑약’을 내세우며 조선은 외교권이 없다고 하는 이유를 들어 방해 하며 1907년 6월로 연기하게 하였다.

고종황제는 당초 예정되었던 1906년 8월 회의를 향하여 회의특사 파견을 준비하였다.

우선적으로 대한제국과 우호조약을 맺고 있었던 나라들에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할 방안으로 헐버트를 일차적으로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특사방문 상대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 등 9개국이었다. 헐버트 에게 전권을 부여하며 이 나라들을 방문하여 대한제국의 입장을 설명하며 도움요청을 하도록 했다. 또한 고종은 헐버트 에 이어 1907년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하였다.

조약상대국에 보낼 고종의 친서를 헐버트가 소지하였다고 하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의 감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주재 일본 통감부는 ”한국민을 선동하는 등 시종일관 우리의 대한정책을 방해하는 헐버트가 서울을 출발했다”고 일본 외무차관에게 보고해 가며 미행감시하기 시작했다. 실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헐버트가 자신에 대한 감시를 이용하여 다른 특사 3인을 따돌림으로 해서 3인 특사가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헤이그 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초 긴장된 밀사들의 잠행이 아닐 수 없었다.

헐버트는 러시아 횡단기차를 타고 헤이그 를 향하여 출발하지만 우방각국 원수에게 보낼 고종황제의 밀서를 중간에 일본에 강탈당할 것을 우려해 미국인 선교사에게 부탁 하여 그의 부인 아기 옷 가방에 숨겨가지고 가서 모스크바에서 전달 받았다고 한다. 심히 긴장되는 상황에서 고종의 밀서를 지켜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철저한 견제로 이 서신을 각국정상들에게 전달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여론을 조성하여 만국 평화회의에 영향을 줄 생각으로 <만국 펑회회의보> 편집장인 영국언론인 스태드를 만나 한국이 처해 있는 불공정한 일본의 핍박을 설명하며 설득하여, 특사들의 활동에 대하여 국제적으로 알렸다. 만약 이러한 헐버트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 당시 상황은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에게 책임을 물어 퇴위시킴으로 해서 나라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후 일본침략자들은 대한제국의 내정을 공식적으로 접수하고 군대까지도 해산시켜 버렸다.

만국평화회의특사 파견은 일본야수들의 통치를 제지하지는 못했으나 일본의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국내외적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헐버트는 1907년 7월 19일 헤이그를 떠나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뉴욕 타임스>와 <뉴욕 헤럴드>등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신문들과 회견을 하며 한국문제에 대한 호소를 했다. <뉴옥 타임스>에는 7월 22일자 회견기사에서 “한국인들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침묵을 지키다가도 계기만 마련되면 분연히 일어나, 1592년 임진왜란 때처럼 게릴라전도 불사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민족의 생존력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헐버트의 이와 같은 일연의 활약은 일본의 불법침략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전파력을 가져왔다.

헐버트는 1905년 당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고종황제의 호소를 거부한 것을 들어 10년이 지난 1916년에 “미국은 당시 한국에 대한 외교적 의무를 다했는가?” 라고 구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며 루스벨트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이에 미국의회와 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를 하며 미국을 흔들어 놓았다. 이에 대하여 루스벨트가 반론을 제기 하는 등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졌던 3년 후 1919년에 루스벨트가 사망하면서 그가 남긴 기록에서 그의 고백을 읽을 수 있었다. “1905년 9월 포츠머스회담에서 내가 일본에 동의하였다”고 하는 메모를 가족에게 남겼다고 했다. 자국 대통령의 결정이 옳지 못했음을 끈질기게 추궁하여 받아낸 양심고백의 문서다. 결국은 1921년에 미국 국무장관 루트도 을사늑약 당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무시한 미국의 행위에 정당성이 없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한국을 그토록 사랑한 헐버트의 한국독립투사적 정의감이, 일본의 한국 점령이 부당했던 사실을 증언하여, 일본침략사의 진실을 기록하게 한 것이다.

3.1 만세항쟁과 헐버트의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만세항쟁은, 한민족이 조국을 강탈한 일본야수들에 대한 울분이 분노 로 분출하며 봉기한 혁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저항시위를 하였던 조선민족의 정신문화가 돋보였던 혁명의 불 꽃이었다.

한편 헐버트의 38년간의 조선독립운동 방법은, 정의의 사도로서 자신의 제2 조국이 되어버린 한국사랑의 용광로와 같은 분출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의 위협에도 물러설 수 없는 용기를 가졌었기 때문이었다.

헐버트는 1895년 10월 8일 일본군대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로 고종황제 또한 암살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상황에서 고종의 불침번을 섰을 만큼 한국사랑에 목숨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러한 위기가 계속되었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서거하게 되었다. 고종황제의 붕어가 일본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고 의심한 국민들은, 그 동안 응집되어 있었던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열망이 1919년 3월 3일 고종황제의 장례일 2일 전인 3월 1일을 기해 혁명의 불길로 분출되었다.

나라를 잃고 핍박 받은 조선인들의 분노가 분출된 3. 1 만세운동은, 비폭력적이었으나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전국적으로 파도를 일으키며 일본 침략자들을 공포로 몰아가며 한국인의 위력을 보였다.

헐버트는 3. 1만세운동 이듬해인 1920년 1월 <국제관계>지에 한민족은 3. 1 만세항쟁에서 원한과 증오를 표출하는 대신 자유를 달라고만 외쳤다면서 3. 1혁명의 비폭력 정신을 평가했다. 이에 한민족의 문명수준을 말해준다고 덧붙였다. 그가 죽음을 앞 둔 1949년 7월 언론과의 회견에서 3. 1혁명은 한민족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정신문화적 가치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헐버트와 여운홍(여운형 아우)은 당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힘입어, 1919년 5월에 개최될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기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임시정부 대표로 참가하게 된 김규식과 함께 각국대표들에게 한국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치밀한 방해에 의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1919년 8월 “한국을 어찌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한국독립호소문’을 스펜서 상원의원의 도움을 받아 미국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제출하여, 3. 1혁명을 알리며 일본의 잔악상을 고발하였다. 그 밖에 ‘한국독립호소문’은 1919년 10월 1일에 펠란 의원이 상원에, 1919년 10월 24일에 메이슨 의원이 하원에 발의한 한국문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헐버트는 3. 1혁명 이후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과 서재필의 한국독립운동 동지로서 이들의 활동에 적극참여하며 미국국민과 의회와 언론을 대상으로 큰 힘이 되고 있었다.

헐버트가 80세가 넘어서 까지 한국독립을 위하여 100편 넘게 기고하였으며, 1천회의 강연, 5천 건의 언론기사를 썼다고, 지은이 김동진은 이 책에서 증언한다.

“만약 친일파가 그랬듯이 우리민족이 일본에 충성만하고 독립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전승국들이 우리에게 그저 독립을 선사할 리 만무하다. 영국의 처칠 은 실제로 한국의 독립을 반대하지 않았는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펼친 활약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본이 패전하였다 해도 광복을 맞을 수 없었거나 한참 뒤에나 맞았을지 모른다.”고 지은이 김동진은 설파한다. (계속)

1255호 14면, 2022년 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