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41)
20세기의 지휘자(1)

문화사업단에서는 ‘20세기의 지휘자’를 주제로 8명의 지휘자를 선정하여 그들의 생에와 음악세계를 살펴보도록 한다.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

음악계에서 19세기가 피아니스트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전문 지휘자가 슈퍼스타로 떠오른 시기다. 대표적인 인물이 카라얀이다.

카라얀을 싫어하는 사람조차 20세기 클래식 음악계가 카라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카라얀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35년간 종신 지휘자로 군림한, 클래식 음악의 살아있는 신화였다.

카라얀 이전까지 일부 상류층이나 고급 취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던 클래식은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해서 대중의 음악으로 성큼 다가섰다. ‘뉴욕타임스’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인으로 카라얀을 꼽았다.

또한 카라얀이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960년대부터 영상물 제작을 직접 기획할 만큼 예술과 마케팅을 이상적으로 결합하여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시킨 선각자였다. 카라얀은 음반과 영상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널리 알렸고, 사람들로 하여금 연주회장을 찾지 않더라도 위대한 음악가들의 작품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통해 보고 들을 수 있게 만든 대표 주자였다.

1940년대 후반, 막 LP 시대가 열릴 때 카라얀은 어떤 지휘자보다 먼저 레코드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때까지 적지 않은 지휘자가 음반 녹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레코딩은 죽은 음악’이라며 음반 녹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라얀은 앞으로는 굳이 공연장에 오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음악을 즐기는 시대가 올 것임을 내다보았다.

1980년대 들어 CD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본 사람도 카라얀이었다. 당시 클래식음악 관계자들은 차갑고 기계적인 음색의 CD가 LP를 대체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CD가 등장한 이상, LP의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CD 녹음에 앞장섰다.

카라얀은 한 인터뷰에서 음반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아무리 음향효과가 좋은 홀이라 할지라도, 자리마다 그 조건은 달라진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2,000~3,000명 정도 들어가는 홀이라면, 좋은 음향효과를 만끽할 수 있는 자리의 수는 대략 200~300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계를 넘어가면 음질은 현격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음반은 음악을 최고의 조건에서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음반은 한 명 한 명 모든 청중에게 지휘자가 머릿속에 그린 바로 그 음악을 들려준다.”

대중가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1935~77)나 존 레넌(John Lennon·1940~80)처럼, 카라얀도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많은 클래식 음반을 파는 지휘자다. 살아있는 어떤 음악가들도 이미 죽어버린 카라얀을 당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카라얀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것은 상승과 확장의 욕망이다.

그는 1908년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의사이자 음악 애호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독주회를 열만큼 피아노 연주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 원장 파움가르트너를 만난 후 지휘로 방향을 바꿨다.

그는 빈에서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팔스타프’와 ‘루치아’ 공연을 듣고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토스카니니의 연주를 듣고 악보 위의 음표들이 지휘자의 손을 통해 얼마나 아름다운 음악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 깨닫는다.

1929년 빈 음대를 졸업한 직후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이때 지휘한 작품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후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 등이었다. 이 때 청중 가운데 있었던 울름 오페라극장의 극장장의 초빙을 받아 독일 울름 가극장의 지휘자가 된다.

당시 울름 오페라극장의 상황은 매우 열악해 단원이 약 20명 정도, 합창단은 16명에 불과했다. 대학 시절 빈 국립 오페라를 견학하면서 공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20대 전반을 울름에서 보내면서 나름 성실하게 임했다. 없는 악기는 카라얀 자신이 피아노를 치며 메워 나가야 했고, 때로 큰 악기들을 수레에 실어 나를 때 직접 도와야 했다.

독일 울름 시립 오페라에서 열악한 환경과 싸우던 그는 27세에 아헨 극장 음악총감독으로 임명된 이후 탄탄한 출세 가도를 달린다. 소도시 울름과 달리 큰 도시였던 아헨은 오페라 극장 또한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카라얀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카라얀은 훗날 아헨에서의 시절을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38년 드디어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국립가극장과 베를린 필에 각각 데뷔했다. 특히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데뷔하면서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신문에서 지칭한 ‘분더 카라얀’ 즉 ‘기적의 카라얀’은 이후 카라얀을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되었다.

2차 대전 직후 전쟁 중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활동을 2년간 금지 당했지만 당시 음악계의 실력자 월터 레그의 도움으로 빈필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47세 되던 1955년에는 마침내 베를린 필 종신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베를린 필, 라 스칼라, 필하모니아, 빈 국립 오페라를 넘나들며 사실상 유럽 음악계를 제패했다.

카라얀이 비판받는 이유는 그가 인생과 음악의 양면에서 거둔 성과가 지나치게 화려했기 때문이다. 음반 판매량에서 그의 옆에 설 연주자는 없다. 카라얀의 음반은 지금까지 1억1500만 장이 팔려나갔다. 이는 ‘노란 딱지’로 유명한 메이저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의 전체 음반 매출량 3분의 1에 해당한다. 레퍼토리 면에서도 그는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 브루크너, 슈트라우스 등 독일 관현악 음악의 핵심 레퍼토리에서 다른 지휘자들이 쉽게 넘보기 힘든 웅장한 성벽을 구축했다. 그는 관현악곡뿐 아니라 오페라에서도 탁월했고, 독일 음악만이 아니라 러시아나 이탈리아 음악에서도 빼어난 녹음을 남겼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에서 최상급의 아름답고 정제된 소리를 뽑아낼 줄 아는 지휘자였던 것이다.

1210호 23면, 2021년 3월 12일